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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현 Jan 03. 2020

<유물론> 리뷰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낯선 감정을 느낀다

  양 극단에 있는 사람들은 종종 비슷한 모습을 보이곤 한다. 예컨대 변증법적 유물론자들을 보자. 그들은 모든 물질들이 상호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끓는 주전자와 흔들리는 개의 꼬리, 그리고 계급투쟁 사이의 연관성을 주장한다. 분석적 맑스주의자들은 이에 대하여 '헛소리 없는 맑스주의(Marxisme sans la merde de taureau)'가 필요하다고 조롱하기도 했다. 역설적이게도 변증법적 유물론은 세계를 하나의 통일된 논리로 해석하려는 관념론과 흡사해진다. 


  신유물론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스스로 유물론자라고 칭하지만 물질의 가변성에 집착하여 사실상 포스트구조주의와 다름없는 장광설을 창조해낸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텍스트'에 집중한다면, 신유물론자들은 단지 '텍스트'의 자리에 '물질'을 넣었을 뿐이다. 이들은 인간을 물질과 같은 지위로 격하시키는 것을 못 견디고 물질을 인간의 지위로 격상시킨다. 정치적 올바름에 천착하는 이들이 인간을 비하하기보다 동물을 찬양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변경하였듯이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움베르토 에코의 <정치적으로 반듯한 사람이 되기>라는 짧은 에세이를 참고하라.) 


  그렇다면 '유물론'하면 먼저 떠오르는 기계적 유물론 혹은 환원적 유물론의 경우는 어떨까? 이들은 신유물론자들과는 반대로 인간의 주체성을 삭제하고, 행위자로서 인간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단정한다. 테리 이글턴은 인간은 자연에 속해있지만, 동시에 다른 자연물들과 차별성을 가진다고 말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을 물질로 격하시키는 기계적 유물론 역시 정도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므로 유물론에 입각하여 모든 문제를 경제 문제로 환원시키는 태도 역시 주의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경제를 찬양하는 사람들을 살펴보자. 그들은 누구보다 경제와 물질에 관심을 기울이는 유물론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계적 유물론의 함정에 빠져있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자신의 몸뚱이를 '추상적인' 상품의 지위로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자본주의는 위장된 금욕주의이며, 자본 축적을 위하여 인간의 유물론적 토대인 신체를 소외시킨다. (이글턴은 이 부분에서 <고통받는 몸>의 저자인 일레인 스캐리를 언급한다.)


  결국 테리 이글턴이 주장하는 유물론은 '신체'로부터 출발한다. 물질이 인간의 토대가 되면서도 동시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신체적 유물론' 또는 '인간학적 유물론'이라고 이름 붙인다. 신체적 유물론은 인간 주체가 스스로에게 '낯선 자'임을 깨닫게 해 준다. 이글턴에게 유물론이란 "물질만이 존재한다"라는 주장이 아니고, 관념론이란 "관념만이 존재한다"라는 주장이 아니다. 자기 속에서 낯섦을 느끼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곧 유물론자가 되고, 인간을 완전히 이해 가능하고 독립적인 존재로 보는 사람들은 관념론자가 된다.


  이런 흐름을 따라가면 프로이트를 신체적 유물론자로 볼 수 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무의식의 발견인데, 무의식이란 곧 우리 자신이면서도 우리 자신이 아닌 낯선 것이다. 또한 니체 역시 한 명의 신체적 유물론자가 된다. 그는 이전의 철학이 몸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켰으며, 몸을 배제해왔다고 주장한다. 이글턴은 마지막으로 유물론적 철학자로서 비트겐슈타인을 발견한다. 언어에 대해서 깊은 연구를 수행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우리의 삶꼴(a form of life)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그의 사상에 따르면 언어는 일상의 실천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실천들은 인간 몸의 본성에 기초를 둔다. 

  

  네 명을 독특한 사상가들을 완벽하게 엮어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글턴도 이들 사이에 차이점이 많았음을 인정하고, 또 지적한다. 하지만 이글턴은 화려한 언변을 뽐내며 사상과 사상 사이를 횡단하고, 각각의 사상가들에 대한 배경지식을 뽐낸다. 중간중간 들어있는 사상가들에 대한 영국식 조롱도 잊지 않는다. 가끔씩은 너무 억지가 아닌가 싶더라도, 그의 글솜씨는 이 책을 계속 읽게나가는 원동력이 된다.


  사람들은 종종 이해되지 않는 고독감에 휩싸이고 이를 해결하려 한다. 하지만 이러한 낯선 감각은 신체를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것이다. 우리가 누리는 고귀한 것들이 사실은 저속한 것에 기반을 두었듯이, 우리가 겪는 (형이상학적인 것처럼 보이는) 고통들도 사실은 우리의 기반인 신체와 물질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체적 유물론자라면 이와 같은 고통들에 종교적이고 문학적인 해석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임을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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