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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현 Oct 16. 2020

<나쁜 교육> 리뷰

당신의 느낌은 전부가 아니다

0.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보호막이 쳐진 거대한 안전 영역에서 걸어 나와 위험하고 불안전한 바깥의 삶 속으로 들어가 거기에 개입하도록 배워야 한다. 우리가 안전한 세계에 살고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 슬라보예 지젝


  오늘날 우리는 과거에 비해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의 목숨이 불필요하게 희생되지 않아도 되는 세상. 이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하지만 안전을 향한 욕구가 또 다른 극단주의를 만들어낸다면 어떨까? 가령 질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무균실에서 살아간다면? 인간관계에서 오는 상처를 피하기 위해 방 안에서 빠져나오지 않는다면? 이것 또한 인간다운 삶이라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일명 'i세대'가 구성원인 대학가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을 접하면 지나친 안전주의에 대한 경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버드 법학대학원에 근무하는 석지영 교수는 "강간법을 주제로 학생들에게 가차 없이 설전을 벌이라고 권하기가 이제는 너무 어려워져 그 주제에 대한 논의 자체를 아예 포기하는 강사들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풍경은 비단 미국뿐 아니라 한국의 대학교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의 원제인 'The Coddling of the American Mind'가 '나쁜 교육'으로 번역된 것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1. 지혜자 미소포노스


  두 명의 저자인 조너선과 그레그는 그리스의 신탁 사제에게 지혜를 구하고자 올림포스 산을 찾아간다. 지혜자의 이름은 미소포노스. 그는 세 가지 지혜를 알려준다.

첫째. 죽지 않을 만큼 고된 일은 우리를 더 약해지게 한다.

둘째. 늘 너의 느낌을 믿어라. 이것에 대해서 절대 질문하지 말라.


셋째. 삶은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 사이의 투쟁이다.


  아마도 눈치챘겠지만 위의 목록들은 지혜가 아닌 대단한 비진실(Great Untruth)들이다. 두 저자는 우화의 형식을 빌어 풍자적으로 현대 사회에 퍼져있는 생각들을 꼬집는다.


  물론 위에 언급된 미소포노스 또한 가상의 인물에 불과하다. 그의 이름을 한번 살펴보자. 무언가를 싫어한다는 뜻의 그리스어 miso. 그리고 노동이나 수고를 뜻하는 phonos. 그러므로 수고를 싫어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학계에서는 '제도화된 부당성 증명'이라는 개념이 통용된다. 예를 들어 20세기 등장한 양자 역학은 빛이 입자인 동시에 파동임을 밝혀냈다. 하지만 이것은 고전 역학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다. 그러나 결국 이중 슬릿 실험을 통해 파동-입자 이중성이 증명되었고, 오늘날 학계에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아무리 권위 있는 이론이라도 반론의 기회가 열려 있으며, 그것이 실험을 통해 증명된다면 학계에 받아들여지는 것. 이것이 오늘날 과학을 지탱하고 있는 제도이자 환경이다.


  하지만 '정치적 올바름'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부당성 증명의 제도가 작동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반론을 제기하는 행동 자체가 소수자에 대한 공격이자 권력의 발현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페미니스트인) 로라 킵니스 교수는 최근의 페미니즘 조류에 비판을 제기하려면 안티 페미니스트로 낙인찍힐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주장이 받아들여지려면 사람들을 설득하는 과정과, 반론에 맞서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수고로움을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이유만으로 생략하려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Misophonos가 아닐까?


2. 정체성 정치와 트롤링


  저자들은 정체성 정치의 좋은 예와 나쁜 예를 구분한다. 물론 나 같은 사람들은 ‘좋은 정체성 정치는 정체성 정치라고 부를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본 서평에서는 책 속의 구분을 따르도록 하겠다.


  좋은 정체성 정치란 ‘보편적 인간성’에 호소하는 전략을 취하며 대표적인 예로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있다. 그는 흑인의 인권을 위해 싸웠지만 항상 분열이 아닌 통합의 메세지를 던졌다. 킹 목사의 전략을 잇는 또 다른 인권 운동가로는 파울리 머리가 있다. 흑인이자 성소수자였던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형제들이 날 따돌리고 자신들만 들어가는 둥그런 원을 그리면, 나는 더 커다랗게 원을 그려 그들을 감싸 안을 것이다.”


  반면에 나쁜 정체성 정치란 ‘공공의 적’을 지목하고 여기에 맞서 싸우도록 자신의 집단을 결집시키는 양상을 가진다. 흑인 대 백인. 여성 대 남성. 성소수자 대 성다수자. 나쁜 정체성 정치는 이분법적 사고를 강화시키며 집단 간의 공통점보다 차이점을 부각한다. 2017년 텍사스주립대학교의 한 라틴계 학생은 교내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존재론적으로 말하자면, 백인이 죽어야 모두가 해방될 것이다... 그때까지 당신네들은 기억해두도록 하라. 내가 당신들을 미워하는 건 당신들은 존재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사실 위의 학생이 정말로 백인들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죽음’이 의미하는 바는 일종의 문학적 표현으로써 백인 중심적 문화의 종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기사는 우파 커뮤니티에 널리 퍼지면서 많은 반발을 샀고, 결국 학교와 교내 신문사에 혐오 표현과 협박을 담은 메일이 날아왔다.


  정치적 올바름에 천착하는 사람들은 이상하리만치 강한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그들의 올바름에 대한 기준에는 예의범절이 포함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강한 수위의 발언으로 상대방을 격분시키고, 격분한 상대방이 강한 말로 받아치면 그것을 혐오 표현으로 비판한다. 인터넷 상에 자주 보이는 트롤링의 모습이다.


  각종 SNS에는 익명에 기대어 한쪽 성별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발언을 하고, 얼마 후 댓글창은 거대한 콜로세움이 된다. 성체 훼손 사건을 벌인 워마드 회원이 알고 보니 남성이었듯이 트롤링을 시작한 당사자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논쟁적인 주제에는 항상 트롤링이 생기며, 수위 높은 말들이 오가며 갈등은 심화된다.


  합리적인 토론이 상실되면 평범한 사람들은 대화 자체를 꺼리게 된다. 따라서 논쟁적인 주제에 대한 대화는 현실 세계에서는 기피 대상이 되고, 인터넷 상에서의 조리돌림과 조롱만 남게 된다.


3. 대학교와 소비자 중심주의


  대학교가 기업화되었다는 비판은 하루 이틀 된 것이 아니다. 대학교들은 서열과 평가에 목매며, 정부와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힘쓴다. 문제는 학생들이다. 한 평생 소비자로 자라온 그들은 누군가의 ‘고객’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매우 잘 이해하고 있다. 메릴랜드대의 에릭 아들러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학 생활의 모든 면면을 자기 구미대로 맞추는 데 익숙한 학생들은, 이제 자신이 몸담은 대학이 자신의 관점도 그대로 반영해주기를 원한다.”


  오늘날 대학생들이 학교에 반영해주길 바라는 관점은 무엇인가? 태어나자마자 인터넷이 존재했던 오늘날의 ‘i세대’는 청소년기에 들어서면서 스마트폰과 SNS를 끼고 자라왔다. 더군다나 2010년대의 다양한 사회 이슈들은 10대들의 정의관념에 영향을 미치기 충분했다.(필자들은 이를 68 혁명 세대와 유사하다고 말한다.) 이 청소년들이 SNS 상에서 경제 뉴스보다 사회 뉴스를 공유하고 ‘좋아요’를 클릭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야말로 ‘사회정의’에 민감한 세대가 탄생한 것이다.


  그렇지만 과연 이들이 주장하는 정의가 보편적인 타당성을 띄고 있는가? 여기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폭력’에 대한 개념을 지나치게 확장시킨다. 폭력은 더 이상 물리적인 폭력에 국한되지 않고 불쾌감을 줄 수 있는 발언까지 확장된다. 왜냐하면 말이 스트레스를 일으키고, 장기간의 스트레스는 신체에 위해를 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일한 논리라면 “여자 친구와의 결별” 혹은 “학생들에게 숙제 많이 내기” 따위도 폭력이 될 수 있다. 실연이나 많은 과제 또한 스트레스를 가져다주며, 스트레스는 만병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폭력에 대한 과도한 민감성은 다른 사람의 발언을 최대한 선의로 해석해야 한다는 ‘선의의 원칙’을 저버리게 되고, 편집증적으로 타인의 숨은 악의를 찾아내려는 ‘적대화된 귀인 편향’을 만들어낸다. 한국의 대학에서도 한 남학생이 여학생을 상대로 “너 정도면 예쁜 편이야”라는 발언을 했다가 학생회 차원을 징계를 받을 뻔한 사건이 있었다.


  둘째. ‘분배적 정의’에 신경을 기울이면서도 ‘과정의 정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버지니아대의 경우 여자 조정 팀은 존재하지만 남자 조정 팀은 존재하지 않는다. 원래는 여자와 남자 모두 조정 동아리로만 활동했었지만, 대학교 스포츠 대표팀의 성비를 똑같이 맞추어야 한다는 수정 교육법 9조로 인하여 여자 대표팀만이 신설되어 학교 측의  금전적 지원을 받게 된 것이다. 덕분에 조정을 타는 남학생들은 사비로 스포츠 활동을 해야 했다. 이는 분배적 정의는 충족시킬지 몰라도 과정의 정의를 무시한 처사이다. 대중들은 과정이 정의로운지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며, 이와 같은 반응은 한국에서도 일명 ‘공정 담론’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셋째.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구별하지 않는다. 예컨대 첨단기술 산업에 종사하는 프로그래머들이 대부분 남성이라는 사실을 관찰했다고 가정해보자. 분배적 정의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남성이 대다수인 고용 현황에서 곧바로 성별에 의한 차별이라는 원인을 지적하곤 한다. 그러나 성별-고용률 사이의 상관관계는 성별 간 차별이 존재한다는 인과관계를 뒷받침하지 않는다. 필자들은 이것이 사회학의 기본 중의 기본임에도 불구하고 대학 캠퍼스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사회학자들이 침묵하는 광경을 지적한다. 과학적이고 자유로운 사고의 흐름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사회 정의’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SJW(Social Justice Warrior)라는 경멸 섞인 별칭을 얻게 되었다. 아마 마틴 루터 킹이나 파울리 머리처럼 다수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의관념에 호소했다면 그들의 행위가 멸시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4.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한국의 징병제는 여러모로 문제점이 많지만 때론 예상치 못한 순기능을 발휘하기도 한다. 일단 입대하게 되면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함께 부대끼며 생활하게 된다는 점. 군대에 다녀온 사람들은 평소엔 만나지 못해 본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체험하게 된다. 낯선 이에 대한 접촉점이 강제로 부여되는 것이다.


  국가에 의해 징병되는 입장에서는 조금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자들은 미국의 학생들에게 대학교 입학 전에 군 복무를 경험해보기를 추천한다. 물론 낯선 타인과의 접촉점을 늘리는 경험이라면 굳이 군대가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학생들이 대학교라는 공간을 아무런 위험 없는 온실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의 저자 마크 릴라는 인터뷰에서 최근 대학교 신입생들의 태도가 놀랍다고 말한 바 있다. 대학생들은 자신의 인종적/성적 정체성에 대하여 누구보다 깊게 파고드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미국의 군사적 문제, 계급 구조, 경제학, 그리고 시민 종교에 대한 관심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주제들은 모두 미국을 더 풍부하게 이해하게 해주는 도구들임에도 말이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의 반의 반만이라도 타인을 위해 기울인다면 어떨까? 각자 자신이 속한 집단을 내세우며 소부족주의에 따라 행동한다면. 또한 자신의 구미에 맞는 커뮤니티에 모여 상대편에 대한 악랄하고 황당한 루머들을 재생산한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스스로 그린 지옥도 속에 살게 될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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