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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현 Dec 21. 2020

<세로토닌> 리뷰

유물론적으로 설명 가능한 사랑

그것은 반으로 쪼개지는 작고 하얀 타원형 알약이다.


신세대 항우울제 '캅토릭스'. 건실한 직장과 풍족한 재산, 그리고 젊고 아름다운 애인까지 가졌지만, 중년 남성 플로랑클로드는 권태에 사로잡혀 캅토릭스를 복용하기 시작한다. 캅토릭스의 대표적인 부작용은 구토와 성욕의 상실이다. 구토는 그를 전혀 고생시키지 않았으나, 성욕감퇴라는 부작용은 심각하게 찾아왔다.


그는 현재 애인인 유주에게서 도망치듯 벗어난다. 그리고 과거의 애인들을 찾아다닌다. 클레르와 마리엘렌, 그리고 까미유. 클레르와 마리엘렌을 만난 주인공은 후회에 사로잡힌다.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들과는 다르게 늙고 병든 그들의 모습의 재회했을 때 더는 아름다운 상상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 추억인 까미유만은 달랐다. 먼발치에서 지켜보았을 때 그녀는 변하지 않는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변한 것은, 그녀는 비혼모로서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는 점이다.


'오래된 애인이 불쑥 눈앞에 나타난다.' 꽤나 연애에 능했던 플로랑클로드는 이것이 최악의 방법임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방법으로는 까미유의 마음을 잡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도. 따라서 그는 까미유의 약한 마음을 파고들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는 친구 에메릭에게 받은 슈타이어 만리허 HS50 저격총을 그녀의 아들에게 겨눈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 아이를 조준하던 플로랑클로드는 결국 마음이 약해져 자리에서 도망친다. 그는 스스로 아이를 죽이지 못할 것과, 평생 까미유와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죽기 직전 묫자리를 찾는 동물처럼 파리의 아파트에 처박힌다. 그는 방 한쪽 벽을 자신만의 페이스북 공간으로 꾸미길 원했고, 케이트와 까미유의 사진을 붙였다. 그리고 그는 삶과 사랑에 체념한 채로 죽음을 기다린다.




<세로토닌>을 읽은 많은 이들이 미셸 우엘벡이 뜬금없이 연애 소설을 썼다며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나 역시 (우엘벡다운 충격적인 몇몇 장면을 제외하고) 꽤나 로맨틱한 내용으로 인해 이질감을 느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엘벡은 항상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해왔다. <투쟁영역의 확장>, <소립자>, <복종> 모두 남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던가. 비록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로맨스물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미디어에서는 두 남녀가 운명의 끈으로 연결되어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것처럼 묘사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인간의 모든 감정이 그렇듯이 사랑 역시 유물론의 한계 아래에 있다. 남녀 간의 사랑이 이루어지려면 첫째로 생물학적 배경이 존재해야 한다. 이성애자인 남녀가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의 영향을 받아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끌릴 정도로 매력적인 외향을 가져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둘째로 물질적 필요가 충족되어야 한다. 연애와 결혼생활을 유지하면서도 먹고살만큼 충분한 금전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 또한 상대방과 계급적 격차가 커서도 안된다. 셋째로 사회문화적 요인이 맞아야 한다. 예컨대 오래된 과거에 존재했던 형사취수제같은 문화는 오늘날 연인들에게 더 이상 용인되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 사는 여자와 이슬람권에 사는 남자의 연애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쉽지 않을 것이다.


68혁명 이후의 신좌파들은 특유의 낭만주의적 기질로 인해 사랑에 관한 유물론적 배경들을 무시했다. 그들은 '개인의 자유'라는 사상으로 실상을 은폐했다. 그들은 성해방이 일어나면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고 연애와 섹스를 즐기는 유토피아가 펼쳐질 거라 생각했지만, 점점 늙어가는 자신의 신체와 점점 좌절되어가는 인정 욕구를 예상하지 못했다. 이러한 디스토피아에 대해 그린 소설이 우엘벡의 전작인 <소립자>이다. 이 소설을 읽었다면 박가분 작가의 서평을 참고하길 바란다.



<세로토닌>의 플로랑클로드 역시 유사한 과정을 겪는다. 그는 클레르에게서 더 이상 추억 속의 매혹적인 연극배우가 아닌 여기저기 살이 붙은 알코올 중독자를 보게 된다. 그리고 까미유를 통해서는 인정 욕구가 좌절되어 망가져버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사랑에 대한 낭만주의와 정신주의로 보정된 추억은 냉혹한 현실 앞에 맥없이 무너진다.




심리학자 카를 융은 종교에서 윤리적/도덕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남은 부분을 '누미노스(numinous)'라고 칭했다. 누미노스는 종교를 단순히 집단의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기 위한 실용적 장치로써 본다면 설명 불가능한 신비주의적 속성이다. 그렇다면 사랑에도 섹스를 제외하고 남는 누미노스가 있을까? 플로랑클로드의 여정을 보면 일견 그럴듯해 보인다. 그는 항우울제 부작용으로 리비도를 잃었음에도 옛 애인들을 찾아다니며, 친절하고 귀여운 호텔 여직원에게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사랑에 에로스를 제외한 플라토닉한 부분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유물론적 제한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에서 섹스를 뺀 여집합 역시 유물론적인 존재 이유가 있을 뿐이다. <세로토닌>의 에필로그를 보면 주인공은 뜬금없이 신의 뜻과 사랑의 신비함에 대하여 설파한다. 그렇지만 이 모든 내용 앞에는 "그것은 반으로 쪼개지는 작고 하얀 타원형 알약이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이 소설의 시작 부분에도 적혀있는 이 문구는 항우울제인 캅토릭스의 외형에 대한 묘사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것. 사랑하는 사람을 친절하게 대하는 것.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며 추억에 빠지는 것. 인정받고자 하는 것. 좌절하여 우울감을 느끼는 것. 함께할 사람이 없어 쓸쓸해지는 것. 이러한 감정은 모두 호르몬의 생물학적 기작에 의하여 발생한다. 이것이 이 책의 제목이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 이름인 이유이고, 항우울제(정식 명칭으로는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가 소설 전반에 등장하는 이유이다.




'근친상간 금지'가 문화와 생물학을 잇는 이음매이듯이, 호르몬은 정신과 물질을 잇는 이음매다. 문화가 생물학과 연결되어 있듯이, 정신도 물질과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진실을 외면한 채로 '완전한 개인의 자유'가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68세대의 실패를 반복할 뿐이다. 또한 이러한 실패는 비단 성적인 영역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모든 규제와 문화적 억압에 저항한다는 명분으로 개인의 자유를 강조한 결과 사람들은 성적인 영역과 경제적인 영역에서 죽을 때까지 투쟁해야 하는 디스토피아적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것이 우엘벡이 첫 작품인 <투쟁영역의 확장>을 통해 이야기하려 했던 주제이다.



국가라는 압제로부터 개인의 선택권을 최대한 보장하고, 무역장벽을 허물어 전 세계적인 자유무역을 추구한 결과 프랑스의 농민들은 전 국가적 차원의 '구조조정'을 당하게 된다. 플로랑클로드의 절친한 친구이자 축산업에 종사하는 에메릭은 마크롱 정부의 농업정책에 강경하게 저항하여 무력시위를 펼치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 장면은 우엘벡이 샤를리 엡도 사태를 예견한 <복종>과 더불어, <세로토닌>을 통해 노란 조끼 시위를 예견했다고 극찬을 받게 만들었다.


하지만 미셸 우엘벡은 미래에 대해서 예견하는 예언자가 아니다. 그는 현재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서술자에 가깝다. 그의 소설은 현실보다 더 현실을 자세히 보여준다. 우엘벡에 대해서 '여성 혐오자', '이슬람 혐오자', '인종차별주의자', '반동성애주의자'와 같은 수많은 비난이 쏟아져도 그의 소설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이유다.


나는  여자를 행복하게 해줄  있었다. 아니,  여자를. 어떤 여자들인지는 이미 밝혔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극도로 자명했다. 하지만 우리는 깨닫지 못했다. 개인의 자유라든가 열린 삶이라든가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환상에 굴복한 것이 아닐까? 그럴  있다. 그런 생각들이 시대정신이었으니까.…그리고 매우 오래도록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p. 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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