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교도소에 접견을 간 날
살인범도 변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
2013년 여름이었다.
나는 변호사가 되었고 교수님의 추천으로 변호사 사무실에서 실무수습을 하고 있었다. 사무실에서는 ‘변호사님’이라고 불렸지만 학교에서 배운 이론과 실무가 얼마나 다른지 실감하며 말 그대로 어리바리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선배 변호사가 함께 교도소 접견에 가자고 하였다. 그 선배를 따라 법정에는 자주 갔지만 교도소라니.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는 교도소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았던 모습이 전부였다. 시멘트 벽의 차가운 공간에서 무섭게 생긴 피고인과 투명한 유리를 가운데에 두고 마주 앉아 대화하는 모습을 상상하였다.
‘어떤 사건이에요?’
선배 변호사가 기록을 툭하고 던져 주었는데 기록 앞면에 피고인의 이름과 죄명이 기재되어 있었다. 살인.
내가 처음 교도소에서 접견을 한 피고인은 살인죄를 저지른 사람이었다.
기록이 꽤나 두꺼웠지만 어떤 사건인지 궁금하여 첫 장부터 읽어갔다. 112 신고 내역, 수사보고, 피의자신문조서, 참고인진술조서. 사실관계가 명확해져 갈수록 사실 무서웠다. 계획적인 살해였고 피해자가 다수였다. 범행 동기는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고 피고인의 진술을 보니 반성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나보다 어린 나이였다. 이제 나는 드라마나 영화 속의 사건들에 들어가는구나. 새삼 나는 변호사가 되었구나 싶었다.
변호사 생활을 하는 동안 수차례 들었던 질문이 있다.
“변호사들은 왜 나쁜 사람들을 위해 변호를 해요?”
나는 이 사건을 하면서 처음 고민하였다. ‘이런 사람을 위해서도 변호를 해야 하나? 내가 이 사람을 위해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지?’ 물론 나는 실무수습 중인 변호사에 불과했기 때문에 사건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 없었다. 실무수습이 끝나고 고용변호사로 일할 때에도 사건 선임은 대표변호사가 하고 나는 대표변호사가 배당하는 사건을 진행해야만 하였으므로 같은 고민은 계속되었다. 피고인들에게는 헌법상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다지만 그 변호를 내가 해야 할 때, 이 피고인에 대한 조금의 안타까움이나 연민도 느껴지지 않을 때 나는 어떤 마음으로 변호를 해야 할까. 살인범을 만났을 때, 아동학대범을 만났을 때, 존속상해범이나 강간범을 만났을 때.
내가 내린 결론은 ‘피고인이 저지른 죄만큼만 처벌받게 하자. 그 이상으로 처벌받게 되는 것은 막아주자.’라는 것이다. 살인을 저지른 피고인이라도 법에서 정해진 형으로만 처벌을 받아야지, 피고인이 무지해서 혹은 수사과정에서의 잘못으로 더 처벌받게 되지는 않도록 도와주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내 마음도 조금 편해졌다. 피고인을 인간적으로 대하기 어려울 때는 사건만 보자, 생각했다.
다시 처음 교도소 접견을 간 날로 돌아와야겠다. 나는 선배 변호사와 교도소 입구에 도착하여 변호사 신분증을 맡겨두고 출입증을 받았고 무거운 철문을 지나 변호인 접견실에 들어갔다. 상상했던 모습과 다르게 접견실은 일반 사무실처럼 깔끔한 모습이었고 유리문으로 구획이 된 방 안에 들어가 피고인을 기다렸다. 변호사와 피고인 사이에 투명한 유리가 있었으나 높이가 낮아 여차하면 피고인과 악수도 할 수 있었다. 조금 지나자 선배 변호사가 접견을 신청한 피고인이 접견실 안으로 들어왔다. ‘살인의 추억’이라는 영화를 보았는지 모르겠다. ‘살인의 추억’에서 배우 박해일이 용의자가 되었을 때 관객이 느끼는 감정. ‘저렇게 순진하고 선하게 생긴 사람이 살인을 했다고?’ 내가 만난 피고인이 딱 그러했다. 저렇게 생긴, 나보다 어린 사람이 살인을 할 수도 있구나...
변호사 10년 차가 되어보니 이제는 적어도 한 달에 두세 번씩 교도소에 접견을 하러 가고 피고인이 어떻게 생겼든, 어떤 범죄를 저질렀든 전혀 놀라지 않는 경지에 올랐다. 또 드라마나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고 사실 현실에선 그 이상의 사건들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는 것도 안다.
오랜만에 그때의 순수했던 나를 떠올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