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변호사이자 법무법인의 대표이자 두 아이의 엄마이자...
불현듯 강한 불안감을 느낄 때가 있다.
잠을 자려고 누웠다가, 아침에 머리를 말리다가, 운전을 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라디오를 듣다가.
오늘이 그런 날이다.
아이들 자는 것 다시 한 번 확인하고 핸드폰으로 유튜브 몇 편을 보며 피식대다가 막 자리에 누웠는데. 이유도 모른 채 머리끝이 따갑다. 안 그래도 수족냉증으로 차가운 손발이 더 차가워진다.
‘내가 지금 놓친 게 있나?’
나는 변호사이다. 사건들을 선임하고 의뢰인과 상담을 하고 서면을 쓰고 재판에 출석한다. 종종 의뢰인들은 전화하여 불쑥 질문을 하거나 무언가를 확인해 달라고 한다. 혹시 내가 확인하고 전화해야 할 일이 있었을까. 오늘 대전 재판을 마치고 전주에 오는 동안 누구랑 통화를 했던가. 가장 끔찍한 건 기간이다. 항소장이나 상고장을 제출해야 하는 기간, 형사 항소이유서를 제출해야 하는 기간, 이의신청 기간, 즉시항고 기간, 기간, 기간. 이러한 기간은 불변기간이기 때문에 기간을 도과하는 순간 되돌릴 수가 없다. 매일 담당 직원이 확인하고 나도 확인을 하지만 혹시라도 내가 놓친 게 있을까. A사건, B사건, C사건, D사건. 빠르게 머릿속에 떠올려보니 문제되는 건 없다. 여기가 아니다.
나는 법무법인의 대표이다. 이번 달 따로 직원들에게 지급될 상여금은 없다. 이번 달 부가세 납부영수증이 나왔나. 내일 세무사님에게 확인해 보아야겠다. 실장님께 직원들의 업무분장을 변경해 달라고 요청하였었는데 아직 결재가 올라오지 않았다. 확인해 보아야겠다. a직원이 이번 주에 연차를 쓴다고 했는데 그게 내일이었나. 그러나 모두 불안할 일은 아니다.
나는 두 아이의 엄마이다. 첫째가 내년에 유치원에 입학한다. 내년 초에 서울로 이사할 계획이라 이사할 지역의 유치원을 알아보아야 하는데 정보가 없다. 내가 이사 갈 지역은 맘카페 가입이 어려워 벌써 1년째 가입하지 못하고 있다. 당장 다음 주에 유치원 우선선발 지원기간이라고 하는데 마음이 조급하다. 둘째가 일주일 넘게 감기로 고생 중이다. 지난주에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내일은 출근 전에 병원을 먼저 다녀와야겠다. 날씨가 추워지고 있어서 아이들 패딩도 하나씩 사두어야 하는데. 우선 이건 미뤄두자.
내년 초에 이사 갈 집의 인테리어를 진행할 업체를 찾아야한다. 이번 주말에 미팅날짜를 잡았는데 가서 어떤 이야기를 해야할까. ‘화장실은 600각 포세린 타일로 졸리컷 시공해 주시고 샤워부스는 조적젠다이로 해 주시고 도기와 수전은 아메리칸스탠다드로 해주세요(인테리어 관련 카페에서 보았던 용어들일 뿐 아직도 저 용어들의 정확한 뜻을 모른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도대체 얼마나 공부를 해야 할까. 주말까진 며칠 남았으니 이것도 내일 생각하자.
A사건 피고소인이 조사를 받았나. 내일 수사관님과 통화를 해봐야겠다. E사건 증인신문이 다음 주구나. 이번주에 신문사항을 작성해 두어야겠다. 지회에서 법관평가 제출하라고 메일이 왔는데 언제까지였지. 다음 달에 가족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아직 숙소예약을 안했다. 이건 남편에게 맡겨두어야겠다. 곧 친정엄마의 생신인데 선물로 어떤 것을 사야할까. 이번 주에는 PT를 받을 수 있을까. 일정이 안 될 것 같다. 내 가을정장도 사야하는데 언제 사러가지. 그리고 또...
아! 자동차검사! 얼마 전에 ‘며칠 안 남았네?’라고 분명 생각했는데, 언제까지더라. 핸드폰으로 확인해보니 오늘까지다. 하아. 과태료가 올라서 4만원이라는데. 4만원어치 맛있는 것을 사먹을 걸. 지난번에 확인했을 때 바로 검사예약을 잡았어야 했는데 왜 미루었지. 한 달 안에 해야하니 지금 예약을 해두자.
이거였다. 그래도 다행이다. 불안감이 어떤 것이었는지 찾았다. 불안감이 사라졌다. 다시 손발이 따뜻해지고 스르륵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다. 다음부터는 자동차검사 일정도 꼭 캘린더에 기재해 두어야겠다.
이제 자야지.
법무법인 여원 대표 변호사 박수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