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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연변호사 Jan 12. 2023

왕따놀이

나는 학교폭력변호사이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열 살 때 우리 반엔 왕따놀이가 유행이었다.     



왕따, 그것도 놀이처럼 유행이라는 건 참 우스운 말이지만 말 그대로 유행처럼 얘가 왕따, 쟤도 왕따, 그 다음에는 그 옆에 있는 애가 왕따가 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열 살짜리 아이들끼리 뭐 그렇게 단합이 잘되었는지 모르겠다. “오늘부터 얘가 왕따야.”라고 공개 선언을 하는 것도 아닌데 가장 주동자격인 애가 한 명과 놀지 않기 시작하면 다 같이 슬슬 눈치를 보며 그 아이를 피했다. 아마 ‘쟤랑 놀면 그 다음 왕따는 나야.’라는 두려움이 있던 것 같다. 물론 나도 왕따가 되었다.     



어떤 기준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왕따가 되는 것은 여학생들 예닐곱 명이었다. 주동자격인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아이는 그 무리의 여학생들뿐만 아니라 반의 남학생들까지 쥐락펴락할 수 있는 아이였다. 여학생들은 그 아이에게 잘 못 보이면 왕따가 될까 봐 눈치를 보았던 것 같고 남학생들은 그 아이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여학생이 시키는 대로, 혹은 시키지 않아도 그 여학생이 좋아할 만한 일을 하였다. 


그 아이는 예뻤다. 그 아이는 우리 반의 여왕벌이었다.      



여왕벌이 A와 놀지 않기 시작하면 A는 왕따가 되었다. 남학생들마저 A를 철저히 소외시켰고 더 짓궂은(=여왕벌을 추종하는) 남학생들은 놀리기도 하였다. 여왕벌 옆에는 오른팔, 왼팔처럼 함께 다니던 여학생 두 명이 있었는데 그 세 명은 쉬는 시간마다 굳이 A의 자리에 가서 팔짱을 낀 채 시비를 걸거나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A에 대한 험담을 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왕따는 ‘유행’이었으므로 여왕벌도 피해 갈 수 없었다. 여왕벌을 왕따 시킬 수 있었던 건 아마 오른팔과 왼팔이 힘을 모았을 때였던 것 같다.     


A가 왕따가 된 뒤 나에게 연락을 했다. 그 당시에 어떻게 연락을 했을까. 핸드폰이나 삐삐도 아니고. 교실에서 대화를 할 수는 없었는데. 쪽지를 보냈을까. 아니면 하교한 뒤 집으로 직접 전화를 했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A에게 연락이 왔고 나는 A를 만났다. 서로 왕따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은 채 운동장에서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거나 고무줄놀이 같은 것을 했고(기둥에 고무줄을 묶으면 두 명이서도 할 수 있다) 그 친구네 집에 놀러 가서 놀기도 했다. A가 왕따를 당한 일주일 남짓의 기간(보통 왕따가 되는 기간은 1~2주일이었으나 특별히 여왕벌, 오른팔, 왼팔은 3~4일 정도로 짧았다)동안 A와 나는 학교에서는 서로 대화를 하지 않았으나 하교 후에는 함께 놀았다. 그 다음 B가 왕따가 되었다. 소문이 났는지 어쨌는지 B도 나에게 연락을 했다. 나는 또 하교 후마다 B와 놀았다. 그리고 내가 왕따가 되었다. 나는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물론 나에게 연락을 한 사람도 없었다.      



내가 왕따가 된 이후 학교에서 대화할 사람이 없어 조금 심심하긴 했지만 나름 지낼 만했다. 쉬는 시간마다 여왕벌과 오른팔, 왼팔이 내 자리에 왔고 나를 자극하기 위해 다양한 이야기를 하며 깔깔대기도 하였으나 나는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문제집을 풀었다. 열 살짜리가 뭐 공부할 게 있었을까 싶지만 왕따이기 때문에 쉬는 시간에 할 게 없었고 그렇다고 그 자리를 피하는 건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다. ‘너네는 지껄여라. 나는 내 할 일을 한다.’ 뭐 그런 마음이었다. 내가 학교에 다니던 1990년대에는 초등학교 3학년도 한 달에 한 번씩 전 과목 시험을 보았는데 일 년 내내 내가 1등을 하였다. 아마 주기적으로 왕따를 당할 때마다 문제집을 풀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나의 경우 왕따가 되어서 가장 힘들었을 때는 운동장에서 아침조회를 할 때였다. 우리 학교는 한 달에 한 번 아침에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교장 선생님의 훈화말씀을 들었다. 조회가 끝나고 교실로 들어갈 때 나는 혼자 걸어갔다. 다들 삼삼오오 짝을 지어 가지만 나는 왕따이니까 혼자서 간다. 우리 반이야 내가 왕따인 거 다 알고 있지만 전교생이 알게 되는 것만 같아서 창피했던 것 같다. 그리고 교실에 들어왔는데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필통이 사라졌다. 내가 주변을 살펴보며 필통을 찾고 있자 누군가가 쓰레기통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다른 것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장면을 기억하는 것을 보면 상당히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이후에 알고 보니 여왕벌을 추종하는 남학생 중 한 명이 쓰레기통에 버린 것이었다. 여왕벌에게 잘했다고 칭찬이라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그 남학생의 이름도 기억한다. 강××.     


이렇게만 보면 내가 여왕벌 때문에 참 힘든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겠구나, 싶겠으나 나는 여왕벌과 자주 어울려 놀기도 했다. 여왕벌은 초등학교에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의, 작은 앞마당이 있는 주택에서 살았다. 주택의 가장 오른쪽 끝 방이 여왕벌의 방이었는데 그 집에 가면 그 방 안에서 놀고는 했다.   

  

그렇게 별로 즐겁지는 않았던 초등학교 3학년이 지나고 졸업할 때까지 다행히 여왕벌과 같은 반이 된 적은 없다. 왼팔과는 같은 반이 된 적이 있으나 여왕벌이 없어서인지 친구들과 큰 갈등 없이 매우 조용하게 생활하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여왕벌에게 ‘왜 나를 왕따 시켰어?’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그 아이는 ‘네가 예쁘고 공부 잘해서 싫었어.’라고 답을 하였다. 아마 이때에 나의 왕따 시절 상처는 어느 정도 아문 것 같다(그래서 위 기억이 전부인지, 이때 상처가 아물어서 위 내용 정도만 기억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만약 여왕벌이 ‘네가 재수 없어서’, 또는 ‘네가 이러이러한 말을 해서’, ‘네가 이러이러한 행동을 해서’라고 이야기했다면 즉, 내 탓이라고 했다면 나는 열 살의 내가 어땠는지를 곱씹어보며 상처를 계속해서 긁어내 지금까지도 마음속 어딘가에 흉터로 남았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예쁘고 공부를 잘해서란다. 그건 뭐. 여왕벌이 나보다 안 예쁘고 공부를 못한 탓이지(다시 말하지만 여왕벌은 추종하는 남학생들이 있을 정도로 초등학교 내에서 가장 예뻤다). 그날 여왕벌과 나는 화장실에서 이 대화를 하며 둘 다 꺼이꺼이 울었다. 여왕벌은 미안하다며 울었는데 나는 왜 울었는지 모르겠다. 겨우 그딴 이유였나 싶어서 억울해하며 울었던 건가 싶다.    


 

그로부터 20년이 훌쩍 지났지만 아이들, 특히 여학생들이 한 학생을 왕따 시키고 괴롭히는 방법은 비슷한 것 같다. 학교폭력 피해학생과 상담을 하면서 “변호사님, 그 가해학생들이 쉬는 시간마다 제 자리 옆으로 와서 저 들으라는 듯이 욕설을 하고 일부러 큰소리로 웃기도 하고요. 제가 지나가면 흘겨보고요.”라고 한다. 

알지, 잘 알지. 이래서 변호사에게는 다양한 경험이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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