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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슬플 예정 71

봄은 마냥 좋은 계절은 아니다

올해도 라일락은 어김이 없다.

그 은은한 자태로,

그 강렬한 향기로 

다시 나를 찾고, 봄을 찾았다.



작년에 한창 삶과 죽음 사이를 방황하고 있을 때, 우연히 발견한 라일락!

잠깐 그게 몇 편이었더라!

아하! 당분간 슬플 예정 20편이었구나!

그때는 4월 12일이었구나!


아!

저 때 다 생각난다.

그때 내 심장의 어느 부위가 아팠는지,

그때 내 뇌는 어디가 고장이 났었는지,

그때 흘렸던 눈물이 뺨 어디를 지났는지,

그때 목은 얼마나 메였던지, 


아픔은 생각보다 선명하게 각인되나 보다.

고통은 영 사라지지 않고, 기억 어딘가에 잘 저장이 되나 보다.

너무 선명해서 흡사 지금 그 아픔을 느끼고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망각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라고 하나보다.


망각하지 않고, 어떤 물체에 의해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게 또 뭐가 있을까?


슬램덩크?

고등학교 교실이 생각나고, 나이키 에어펌프를 신던 경동고등학교 송수천이라는 친구도 생각나고, 나이키 운동화 신고 싶었던 나도 생각나고!


요구르트 배달 차?

종암동 산동네도 생각나고, 엄마도 생각나고, 추운 그 해 겨울도 생각나고, 얼음판에 미끄러지던 우유 리어카도 생각나고, 네로와 파트라슈도 생각나고(고등학교 때 내 별명은 ‘종암동 파트라슈’였다. 새벽에 우유 배달하고 학교에 다녔기 때문이다)


교회?

아무리 술을 드셔도 제사는 꼭 지내시던 아빠도 생각나고, 대학 들어가면서 교회 다니기 시작하면서 제사 날에 들어오지 않던 큰 형도 생각나고, 그래서 더 화를 내시던 아빠가 또 생각나고,,,


김동률의 ‘오래된 노래’?

피아노에 한 맺힌 아이의 몸부림도 생각나고, 어떻게든 우울증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절규하던 순간도 생생하고, ‘아! 이제 됐다!’하며 안도하던 씁쓸함도 잊힐 리가 없다. 


사물이 사물인 이유는 기억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음악이 음악인 이유는 추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체가 온다는 것은,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절대 잃어버릴 수 없는 과거와의 조우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망각은 어쩌면 선물이 아닐 수도 있겠다. 좋은 기억들만 가져올 수 있다면!


그런데, 아픈 기억이라야 더 선명하게 남는 법!


라일락만 돌아왔으면 참 좋았을 텐데…

불면증도 다시 돌아왔다.

슬픔도 다시 돌아왔다.

우울증도 다시 고개를 드는 듯하다.


왠지 파블로프의 개가 된 기분이다.

종소리만 들었는데, 침을 흘리는!

라일락 향기만 맡았는데, 슬프고, 아프고, 우울한!

건강해지기는 틀린 건가?

의식이란 존재하는 건가?

존재하긴 하되 연구할 수 있기는 한 건가?

문득 스키너가 그립다.

유기체의 능동적 조건반응!

‘의식은 모르겠고, 유기체는 목적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반응한다!’

그래 나도 ‘내 슬픔이나 아픔은 모르겠고, 목적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삶에 임해야겠다. 내가 하는 일이 꽤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누군가는 이런 나에게서도 지혜를 얻고, 지식을 얻어 변화해가고 있지 않은가?

그 목적만 생각하자!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고, 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으며, 꽤 근사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만 생각하자.


그렇게 이번엔 좀 쉽게 건너보자.

슬픔 그까짓 거 한 번 겪었으니, 반갑다 눈인사하고, 어쩌면 악수 한 번 하고 허허 너털웃음 한 번 짓고 갈 길 가 보자.

이젠 ‘원래 이런 게 인생이지’하며 받아들일 때도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런 고통 속에서 삶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알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라일락 향기가 아픔일 수 있다는 사실!

봄이 더 이상 무조건 아름답지만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서럽고 안타까운 밤이다.

그 사실에 내가 위로하고, 내가 위안하겠다.

세상 사람들을 위해!

아직 이것을 모를 무작정 행복해할 사연들을 위해!


그때까지 참을 예정!

그때까지 깨달을 예정!


#라일락 #불면증 #우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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