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당분간 슬플예정 81

눈 내리는 겨울 밤이 아름다운 이유

연말이 4일 남았다. 

눈이 내린다길래, 자정이 다 된 시각에 길거리로 나섰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마음 위로 눈이 내려 앉는다.

미처 인사하지 못한 가을이 홀연히 떠나버린 자리에, 겨울은 조용히 너무도 빠르게 다가왔다. 

아무도 없는 거리, 간간히 지나다니는 차, 가로등 불빛에 눈송이들이 조용히 날린다. 

적막한 아름다움은 고통의 시간들을 불러 세운다. 아름다운데 어째서 죽을 것 같이 힘들던 시간들이 떠오르는 걸까? 


숨 쉬는 것이 제일 힘들었던 시절,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던 시절,

세수 한 번 하고 울음이 멈추질 않아 화장실에 주저 앉아 한 시간씩 절망하던 시절,

지하철에 앉아있는데, 앞에 서 있던 사람의 구두 코에 갑자기 미친 놈처럼 울어버리던 시절,

산에 올라 바위에 말 걸고, 나무에 말 걸고, 다람쥐에 말 걸지 않으면 미칠 것 같던 시절, 

식탁에 앉아 젓가락 드는 것이 힘들어서, ‘내가 왜 이래?’하며 통곡하던 시절, 

걷다가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아서, ‘이렇게 죽는구나!’하며 서러워하던 시절, 

물 한 모금 삼키는 것 조차 맘대로 되지 않아, 몇 번이고 꿀꺽꿀꺽만 하던 시간,

수면제 없이는 당췌 잠드는 것이 불가능해서 매일 밤 약에 의지했던 시절!


시절은 지나갔지만, 아픔은 남았다.

시간은 지나갔지만, 기억은 선명하다.


‘시간이 약이다?’ 

과연 그럴까?

약은 치유하는 것이다. 

내가 치유가 된 것일까?

이렇게 뜬금없이 아픔이 너무도 선명하게 할퀴어진 상처로 새겨져있는데?

이렇게 갑작스런 순간에 불쑥 날카로운 가시처럼 마음을 찌르는데?

이렇게 아무일 없는 순간에 느닷없이 찢기듯 아파오는데?

이렇게 불현듯 날카로운 비수처럼 가슴을 파고 드는데?

이렇게 홀연히 아픔이 생채기를 남기는데?

이렇게 별안간 잊었던 기억이 얼음처럼 차갑게 심장을 꿰뚫는데?

이렇게 문득 송곳 같은 아픔이 온 몸을 훑고 지나는데?


아픔과 고통은 ‘시간으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

아픔과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고통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바뀐 것이다.

우울과 공황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마음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앉은 채, 

‘조심해! 난 언제든 준비되어 있어! 나 건드리지 마! 여차하면 뛰쳐 나갈거야!’라며 나를 협박한다. 


지난 5년을 돌아본다. 고통스러웠고, 아팠고, 힘들었고, 괴로웠고, 외로웠다. 그런 시간들을 지나온 자라야 만이, 눈송이 하나에 이렇게 감동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움, 묵묵함, 어쩌면 장엄함! 그들이 서사가 되어 밤을 채운다. 

눈송이들은 나의 이야기를 듣는 듯, 나의 시간들을 위로하는 듯 하나하나 쌓여간다. 

지난 시간들은 허무하지 않았고, 그 시간들 한 중간에서 나는 단단해졌다는 것을 알겠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올 것이다. 밤은 아침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올 것이다. 겨울은 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바람이 매섭고, 날이 춥다는 것은 나무들이 싹을 틔우려고 모두 잠든 이 밤에 악착같이 힘을 내고 있다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바람이 아무리 세게 불어도, 눈보라가 앞을 가로막아도 작은 생명은 불굴의 의지로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눈송이는 하늘에서 떨어지는데도 두려움이 없다. 땅에 닿아 녹아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여정에 충실할 뿐이다. 눈송이는 그렇게 자신의 방식으로 겨울을 빛낸다. 두려움없는 용기! 


겨울의 의지와 눈의 용기가 내게 삶의 메시지를 전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 두려움없이 전진하라는 것, 녹아 없어져도 빛내라는 것, 자신의 삶에 충실하라는 것!


눈 내리는 겨울밤은 이래서 아름답다. 


시간이 지나고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는 밤이다.

계절이 지나고 있음을 비로소 느끼게 되는 밤이다. 


내가 나이가 들었나 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