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필화 Jan 08. 2024

팬심으로 할 수 있는 일

《죽이는 화학》

안녕 필화 님.


제가 이번엔 답신이 많이 늦었어요. 늦을 수밖에 없던 속사정을 말씀드렸고 너그러이 이해도 해 주셨지만 그렇다고 제 마음이 결코 편하지는 않았답니다. 아시다시피(알려나… 먼산…) 제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미뤄두면 굉장히 마음이 불편해지는 그런 사람 아니겠습니까. 물론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이 집에서 저와 동거 중이면서 성이 다른 분들 중 가장 연장자이신 그분께서(볼드모트인가… 왜 말을 못 해) 예? 누가 그렇다고요?라고 반문할 게 뻔해서, 미리 가드 올리는 차원에서 부연하자면 ‘살림’은 일이 아니에요. 저한테는. ‘노동’이죠… -_- … 그것도 누군가의 엄정한 기준에 절대 미치지 못할 중노동. 가끔은 그냥 베르단디를 찾으러 떠나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참습니다. 에헴.



그나저나 《고서 수집가의 기이한 책 이야기》말이죠. 저도 물론 그 책을 갖고 있답니다. 헷. 갖고만 있습니다. 아직은. 못 읽었어요. 하지만 필화 님의 답장을 보니 조만간에 반드시 읽어야겠다는 의욕이 샘솟습니다! 다 읽으면 바로 카톡으로 알려드리겠어요.


음, 이걸 자매품(?)이라 해야 할지 좀 애매하기는 한데, 《헌책방 기담 수집가》라는 책이 있어요. 헌책방을 운영하시는 윤성근 님이 쓰신 책인데, 엄청 재미있어요! 중고책 하면 역시 여러모로 사연 있다,라는 표현이 딱 아닌가요.

저도 중고책을 상당히 좋아해서 사기도 많이 사는데, 지금껏 구입했던 중고책 중에서 제일 저를 속상하게 했던 중고책 이야기를 잠깐 하고 갈게요. 책 제목은 굳이 언급하지 않겠는데, 그 책의 면지를 펼쳐보고 저는 제가 저자가 된 것처럼 슬펐었습니다. 이유는요, 면지에 편지에 가까운 긴 헌사와 함께 그간 살뜰하게 살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가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그 책을 간직하고 계셨으면 좋았을 분들의 조카였습니다. 휴. 우울한 이야기는 이쯤 할게요.



자, 그건 그렇고.

지난 주에 읽은 책들 가운데(넵! 이번엔 선택의 폭이 조금 넓었어요) 보여드릴 건 처음부터 정해두었지요. 아마 이 책을 보시면 빵 터지실 듯. 그러고 이렇게 말씀하시겠죠. 너 결국 이거 샀구나. 오디오 지원되네요.


우리 지난번 서점 같이 갔을 때 제가 이 책을 유심히 들춰보자 막 웃었잖아요, 필화 님! 그거 재밌을 것 같지, 이러면서. 기억 나시죠? 그리고 아시다시피 제가 독살과 독극물에 관심이 좀 지대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제 에지간한 독극물을 이론상으로는 어떻게 다루면 좋을지 꽤 잘 알고 있습니다… 하. 하. 하.

적어도 비소와 시안화물, 벨라도나에 대해서는 즉석 강의도 해드릴 수 있습니다. ㅋㅋㅋ 그러나 해달라고 하면 이 분 저의가 뭐지? 하고 의심하겠어요.

실없는 소리는 이쯤 해두고.





《죽이는 화학》의 저자는 당연히도 화학자입니다. 화학자이며 애거서 크리스티의 열렬한 팬이래요. 그러니 이런 책도 쓰신 거겠죠? 이야, 팬심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기획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참신한 기획을 좋아하는 기획 매니아 아니겠습니까. 맨날 아이디어만 넘쳐나고 실행에 옮길 시간은 없고 그러니까 제가… 죄송합니다. 애니웨이…



아무튼, 그래서 이 책에서 저자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 중, 살인에 이용되었던 독극물 중 14종을 상세하게 화학자적 시선으로 친절(간혹 과도하게 학술적)하게 설명합니다. 어찌나 친절한지 중학교 화학교과서를 다시 읽는 기분이었어요. 하지만 흥미로웠습니다. 예를 들어 비소화합물에 중독된 시신과 시안화물에 중독된 시신의 차이가 뭔지 아시나요? 저는 알지만 이런 위험한 정보를 함부로 노출하지는 않겠습니다. 훗.



그러고 보니 우리 시즌 1에서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이야기도 잠시 한 적이 있었죠. 애거서 크리스티 많이 읽으셨나요? 어떤 작품을 제일 좋아하시는지 궁금하네요. 저는 미스 마플이 나오는 작품을 특히 좋아했고, 에르큘 포와로가 나오는 건 상대적으로 덜 좋아했어요. 그 벨기에인 탐정은 어쩐지 저의 취향이 아니었답니다.



제가 가장 무서워했던 작품은 《잠자는 살인》인데, 역시 미스 마플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작품의 세부적인 내용은 모조리 잊어버렸으면서도, 그 음울한 분위기만큼은 너무 강하게 뇌리에 박혀버려서 실로 오랫동안 밤잠을 설치며 어머니의 신경을 긁어댔기 때문에… 저의 《잠자는 살인》 단행본은 마당에서 화형을 당했지(!) 뭡니까. 그 옛날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책등이 빨간 크리스티 전집 기억하시나요? 그 시리즈의 표지, 지금 다시 봐도 무섭긴 하네요. 10대 초반의 쪼꼬맹이가 잠 못 잘 만도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독살 스토리는 아니었어요. 혹시나 해서 알려드리는 거지만.



그러나 이 엄청난 책을 다 읽고 나면,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 대단한 지식에 경탄을 표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자연에 숨겨져 있던 이 엄청난 비밀들을 기어코 발굴해 낸 연구자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이지, 인간이란 실로 대단하고(종종 한심하지만) 참으로… 경이로운 존재가 아닌가요.

오랜만에 인류애, 아니다. 이건 뭐라고 할까요. 자부심? 네, 자부심으로 하죠. 그런 마음으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그런 텍스트를 만나서 굉장히 뿌듯했습니다.



이 기분으로, 배경음악 하나 듣고 가시죠. 대한항공 광고음악으로들 많이 알고 계시고, 원제도 많이 알려진 곡입니다.

에드워드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 Pomp and Circumstance March No. 1 in D Major, Op. 39/1

 듣고 가셔도 되고요… 그냥 가셔도 되고, 뭐… (옷자락 쭈욱)




이건 뱀발입니다만, 안과에서 혹시 동공 확장제라는 거 넣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저는 이 책을 읽다가 벨라도나의 성분이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순간 버엉… 하고 말았답니다. 그나저나 그런 이유로 그 오래 전의 여성분들은 눈이 크고 울망울망 예뻐보일 수 있다는 이유로 벨라도나를 눈에 꼬박꼬박 넣으셨다 하니, 사랑스러운 눈망울의 대가로 후에 치렀을 그 비싼 대가를 생각하면 그저 눈물이 그렁그렁해질 뿐…


제가 이런 이야기들을 읽으며 마음이 오락가락했을 때 필화 님은, 지난 주에 무슨 책을 읽으셨을라나요?






에드워드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 Pomp and Circumstance March No. 1 in D Major, Op. 39/1

https://www.youtube.com/watch?v=qGIM5HdnY4g

이전 04화 좋아하는 마음은 요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