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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작 Nov 03. 2023

시시하지만 짜릿한 보상

언젠가 라면을 먹다가 '유퀴즈'에 나온 장한나의 영상을 보게 되었다. 첼리스트에서 지휘자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녀 특유의 호탕한 화법으로 전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야기도중 무심결에 튀어나온 한 마디는 먹던 라면도 다시 보게 할 만큼 대단했다. 그 말인즉, 장한나는 자신이 만족하는 결과를 얻어 기분이 좋을 때, 보상으로 라면을 먹는다는 것이었다.     


남녀노소 모두가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조리법도 간단한 라면이 세계적인 음악가에게는 특별한 선물과도 같은 거라니......  자신을 얼마나 엄격하고 깐깐하게 단련시키며 음악가의 길을 걸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클래식을 찾아서 들을 정도는 아니지만, 오래전부터 장한나를 응원해 온 먼발치 팬으로서 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동시에 나를 깨우는 말이었다.

     



얼마 전, 나도 나에게 보상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가지 일들을 정해진 기한 안에 딱딱 끝냈고, 공부방에서나 집에서나 큰 소리 없이 무탈하게 보내 칭찬스티커 서너 개쯤은 붙여줄 만하다고 느꼈다. 그때 나도 장한나처럼 라면을 먹어볼까,라는 생각이 1초 정도 뇌리에 스쳤지만 이미 너무 많은 라면을 맛본 터라 이건 보상이라 할 수 없었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여유롭게 차라도 마시고 올까 싶었으나, 시간이 넉넉지 않았다. 행복한 고민을 하던 중 시시하지만 짜릿한 '그것'을 보기로 했다. 언제 어디서나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지만 나에게는 더없이 특별한 그것.  다름 아닌, 드라마였다.


단,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시청할 드라마는 마지막 화까지 공개된 상태여야 하고, 정주행은 절대 안 되며 딱 한 시간만 봐야 한다는 것.  물론 내가 드라마를 본다고 해서 뭐라고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지 까딱하면 드라마 폐인이 될만한 후천적 인자가 다분해서 일상이 제대로 흘러가도록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드라마 작가를 꿈꾸던 30대 중반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드라마 폐인처럼 살아도 목표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나보다 아이들이 더 드라마 본방 사수에 열을 올리고, 유튜브에서 같은 장면을 반복 재생하고, 등장인물들과 비슷한 차림새를 하고 싶어 하는 걸 보고 갑자기 불안해졌다. 내가 하던 짓을 아직 초등학생인 아이가 따라 하는 게 상당히 거슬렸다. 아무래도 내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자각이 들었다. 그렇게 '이태원 클라쓰'를 마지막으로 드라마를 보지 않았고 공부하듯 읽던 대본집도 모두 처분했다.


물론 한동안은 금단증상에 시달리듯 좋아하는 작가나 배우와 관련된 드라마 기사만 봐도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그러나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점점 드라마와의 거리가 벌어졌다. 드라마에 쏟았던 에너지는 자연스레 육아와 일로 옮겨갔다. 일에는 책임감이 따르다 보니, 드라마는 안중에도 없어졌다. 덕분에 '더 글로리'가 연일 화제일 때도, 남편이 '재벌집 막내아들' 좀 보라고 부추길 때도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친 몸과 마음의 안식처가 필요할 때, 이 고단함을 어루만져줄 뭔가가 필요했다. 누군가와 수다를 떠는 것도 큰 힘이 되었지만 이것은 서로의 타이밍이 중요했다. 그러자 문득 내가 좋아했던 드라마의 대사들이 떠올랐다. 드라마 속 주인공의 상황은 나와 판이하게 다른데, 그들의 대사는 나에게 꼭 들어맞았다. 가상세계의 말 몇 마디가 현실의 나를 위로했다.


그렇게 위로받은 드라마 중에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은 노희경 작가가 쓴 '그들이 사는 세상'이다. 남녀 주인공의 솔직하고 털털한 모습이 길을 가다 마주칠 수 있을 만큼 현실적이라 마음이 갔다. 그러나 이 드라마의 압권은 드라마의 시작과 동시에 흘러나오던 내레이션이다. 여주를 맡은 송혜교의 내레이션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친구도 필요 없고, 애인도 필요 없고, 하늘아래 나 혼자인 것처럼 철저히 외로울 때가 있다."  


또 다른 애정의 드라마는 하명희 작가가 쓴 '사랑의 온도'다. 이 드라마에서 내가 반복해 듣는 대사는 셰프 역을 맡은 주인공 양세종이 연인인 서현진에게 하는 말들이다. 처한 상황이 나와는 1도 같지 않은데, 희한하게 듣는 순간 나를 위한 대사가 된다.


"산을 하나 넘으니까 산이 하나 더 기다리고 있더라고."

"난 흔들려서 넘어지면 잡아줄 사람이 없어. 흔들려도 되는 인생이 아니라는 거야."



이번에도 나는 이 대사들이 나오는 부분을 한 시간 동안 돌려보았다. 이제 연애의 설렘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보니 키스신이 나오면 마구 스킵했고  어떤 말로 주인공이 위기를 넘기는지에 집중했다. 그런 장면을 보며 지금 내가 하는 고민은 너무나 당연한 거라는 전제가 마음을 사르르 풀어주었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이 생각 저 생각하며 대사를 곱씹다 보니, 내가 조금 더 성숙해진 느낌이었다.




장한나는 첼리스트로 활동할 때 휴가를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연습을 하루 안 하면 내가 알고 이틀 안 하면 비평가들이 알고 삼일 안 하면 전 세계가 다 알기 때문이라고. 세계적인 거장에게 라면이 짜릿한 보상일 수 있는 까닭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누릴 수 있는 것들을 과감히 포기하고 음악에 몰입했기 때문일 것이다.


거장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누군가에게는 시시한 드라마가 나에게는 특별한 선물과도 같다는 건 나 역시 많은 것들을 포기하며 열심히 살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흔한 것을 흔하지 않게 만드는 지금의 나에게 잘 나아가고 있다고 스스로 토닥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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