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라디오에서 들은 육아 전문가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자녀가 사춘기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냐는 한 청취자의 질문에 전문가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춘기 자녀는 24시간 화가 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피부로 느껴졌다. 아이는 5학년이 끝나갈 무렵, 나와 나누는 모든 대화를 짜증과 신경질로 받아쳤고 눈빛이 사나워졌다. 방문을 걸어 잠그는 건 물론, 늘 귀에는 이어폰, 손에는 스마트폰이 들려있었다. 나와 약속한 인터넷 사용 시간 같은 건 당연히 지켜지지 않았고, 중학생이 되자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나는 그런 딸을 보는 게 너무 버거워서 홧김에 ‘그럴 거면 집을 나가라’ ‘네 인생 네가 알아서 살아라’ 같은 말을 내뱉기도 했다. 아이의 존재가 혹 같아서, 하루라도 빨리 떼어내고 싶었다.
그런데 그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아이가 기숙사 생활을 하는 고등학교에 가게 된 것이다. 게다가 예비 고1일 뿐인데, 아이는 마치 성인이라도 된 것처럼 대부분의 결정을 혼자 알아서 해버렸다.
“엄마, 나 친구랑 저녁 먹고 갈게. 좀 늦을 거 같아.”
“엄마, 내가 생각해 봤는데 학원은 아무래도 그만 다니는 게 좋겠어.”
“엄마, 주말에 별다른 계획 없지? 그럼 나 친구들이랑 서울 갔다 올게.”
‘엄마’라는 호칭만 앞에 붙였을 뿐, 아이의 말은 대부분 통보였고, 내 의견을 물으며 고민하는 과정 따위는 종종 생략했다. 처음에는 이런 상황이 좀 낯설어서 일찍 들어와라, 학원은 더 가야 한다, 서울에 너무 자주 가는 것 같다, 지금이 제일 중요한 시기다 등 석연찮은 마음을 먼저 드러냈지만, 아이는 내가 뭐라고 하든 하고 싶은 대로 했다. 고등학교 합격 발표 날에는 묻지도 않고 귀를 뚫고 왔다. 기분이 썩 좋진 않았지만 언제 이렇게 컸나 싶어 신기했다
가족 여행으로 일본에 갔을 때, 아이의 모습은 더 놀라웠다. 일본 애니와 드라마, 다큐멘터리 등을 자주 보는 건 알았지만, 일본어 실력이 이 정도로 출중할 줄은 몰랐다. 대부분 택시를 타고 이동했는데 아이는 기사님 옆 자리에 앉아 대화를 나누며 현지인 같은 포스를 뽐냈다. 게다가 3박 4일 내내 우리의 귀와 입이 되어주었다. (그동안 일본 애니 좀 그만보고 부족한 과목 공부 좀 하라고 한 게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또 혼자 쇼핑하며 거리를 걷고 싶다고 해서, 하루 중 몇 시간은 따로 다녔다. 나는 아직 미성년자인 아이가 혼자 다니는 게 걱정되어 카페에서 기다리면서도 좌불안석이었지만, 낯선 나라를 당당하게 누비는 아이의 모습에선 아우라가 느껴졌다. 아이의 몸과 마음은 이미 나와 헤어질 준비가 된 듯 보였다.
기숙사에서 첫 주를 보내고 집에 온 날, 아이는 기프티콘으로 간식을 먹겠다며 저녁 아홉 시쯤 집을 나서더니, 날 생각해 떡볶이까지 사 들고 돌아왔다. 노부부가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팔고 계셨다며 일부러 그곳에서 사 왔다고 했다. (나한테 그 돈을 이체해 달라고 한 건 당황스러웠다...) 부쩍 어른스러워진 모습이 대견해 사춘기 딸 노릇은 이제 그만해도 되겠다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다시 기숙사로 돌아가는 날, 저녁을 먹여서 보내고 싶었지만, 아이는 친구들과 기숙사에서 만나 같이 고기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며 서둘러 짐을 챙겼다. 그 말에 서운함도 잠시, 자녀를 다 키운 분들께서 ‘애 키울 땐 아이가 빨리 내 곁에서 떨어졌으면 하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하면 아이를 다시 집으로 불러들일지 그 고민을 하게 된다.’라고 한 말이 이해됐다. 아직 고등학생이니 성인이 될 때까지 3년이란 시간이 남아 있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아이는 빨리 독립적인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둘째를 데리고 집에 오는 길에허전한 마음이 들어음악을틀었다. 휘트니 휴스턴의 ‘Run to You’라는 노래였다. 라디오에서 우연히 들었는데 너무 좋아서 유튜브에 저장해 두었었다. 나는 이 감성을 둘째와 공유하려다 젤리처럼 흐물흐물해진 내 속내를 들킬까 봐 볼륨을 줄이며 뒷좌석에 앉은 아이에게 물었다.
“이 노래 같이 들어볼래?”
“난 괜찮아. 엄마 듣고 싶은 거 들어. 이 이어폰 노이즈캔슬링이라 차단 잘 되거든.”
이미 아이의 귀에는 이어폰,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있었다.둘째가 나를 찾을 시간도 희미해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