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리딩 모임 덕분에 예정에도 없던 책들을 내리 두 권이나 읽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 이어 호프 자런의 <랩 걸>까지.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랩 걸> 역시 엄연한 과학 도서이고, 두 권 모두 만만치 않은 쪽수였지만 이 어려운 책들을 끝까지 잘 읽어냈다. 한때는 소설이 아니면 보지 않을 정도로 편독이 심했는데 어느 틈엔가 소설은 뒷전이 되었다. 알지 못한 세계를 탐독하는 재미가 이렇게 쏠쏠하다는 걸 전에는 왜 몰랐었는지. 최재천 교수가 <공부>에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책은 우리 인간이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발명품’이니 ‘한 번도 배우지 않은 책을 공략해 보는 것’이 좋다고.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책을 읽으며 과학이라는 학문 영역에 눈을 돌릴 수 있게 되어 지식이 쌓인 건 실감하나, 내 마음이 닿은 부분은 과학자의 ‘삶’이라는 사실이다. 마치 배움의 끝은 ‘삶’인 것처럼 종국에는 이 과학자는 어떻게 살아냈고, 살고 있는지로 귀결되었다. 그래서 호프 자런이 자신을 ‘집 없는 개’에 비유하며 몇 날 며칠 땅을 파고 실험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이뤄낸 결과들을 써 내려갔지만, 나는 그의 연구나 성과보다 집념과 열정에 탄복했고 또 하나의 삶을 배웠다. 그저 배경에 지나지 않았던 나무를 생의 중심에 놓는, 덩굴과 잡초처럼 강인하고 꿋꿋한, 부활초처럼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그런 삶 말이다. 그 모습이 마치 식물 같아서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는 한 사람의 성장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내가 본 자런의 삶은 생각보다 우아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실험실에서 하는 작업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인정받기까지는 열정페이가 뒤따라야 했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 때문에 약물을 복용하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 없는 날들이 이어지기도 했다. 자런은 호텔 회의장 뷔페에 혼자 서 있는 괴짜 과학자였고, ‘사랑의 영역에서는 할인 대방출 코너에 방치될 종류의 인간’이었다. 만약 자런에게 ‘빌’마저 없었다면 어땠을까. 빌은 자런과 함께 땅을 파고 흙을 만지고 씨앗을 채취하는 실험실 동료이자 소울메이트였다. 그래서 빌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반가움이 컸다.
사실 지금까지 ‘과학자’ 하면 하얀 가운을 입고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모습이 먼저 떠올랐다. 그래서 과학자는 대단히 머리가 좋고 뭐든 똑똑하게 일을 처리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자런은 부모님께 전화하거나 신용카드 결제 대금을 납부하는 일보다 실험실 작업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제때 하지 못한 일에 대한 죄책감을 실험으로 덜어내는 과학자였다. 모녀 관계도 그랬다. 엄마에게 애정 어린 행동을 하는 대신 각자만의 고집스러운 방식으로 사랑을 전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 부분에서 왜 그리 안도감이 밀려오던지. 엄마와 딸에게는 그리 다정하지 못한 나를 토닥여주는 듯했다.
자런은 과학은 ‘일’ 일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말했으나, 일을 멈추지 않았다. 표본을 채취하기 위해 길을 나설 땐 끼니로 사탕 봉지를 챙겨가야 할 정도였지만 끊임없이 문을 두드렸다. 환경에 맞게 진화하는 나무처럼, 관습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면 과감하게 자세를 바꿨다. 그 결과 여러 나라에 터를 잡으며 살았고, 클린트를 만나 순식간에 결혼도 했으며 고통 끝에 아들도 낳았다. 그리고 마침내 생존을 위해 모든 신경을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시기를 맞이했다. 절망뿐일 것 같던 그의 삶이 활짝 피어날 수 있었던 건 언젠가는 문이 열릴 거라는, 그러니 그 어떤 시간도 낭비가 아니라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런이 말하길, 매년 지구의 땅 위에 떨어진 수백만 개의 씨앗 중 5퍼센트도 안 되는 숫자만이 싹을 틔운단다. 그중에서 또 5퍼센트만이 1년을 버틴다고 한다. 그러니 나무에 대한 연구를 시작할 때 무엇보다 중요하게 해내야 하는 일은 어린 나무를 기르는 것이라고. 실패할 확률이 다분하다는 걸 알면서도 질주하듯 일에 몰두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실패를 품고 가는 것이다. 그러면 찰나의 반짝임에도 희망을 지니고 계속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나는 성공에 대한 기대가 큰 편이다. 그래서 작은 흔들림에도 맥을 못 추고 넘어지곤 한다. 특히 사회생활과 육아가 그랬다. 잘하려 할수록 종종 넘기 어려운 장벽에 부딪혔다. 그러나 돌아보니 계속 나아가려는 사람에게 장벽은 잠시 숨을 고르는 장소일 뿐이었다. 삶은 그런 게 아닐까 싶다. 그래도 살아가는 것. 확률로 본다면 하루, 한 달, 일 년을 온전히 살아낸 것만으로도 성공이 아닌가. 자런의 이야기를 읽으며 지난날, 내가 의식하지 못했던 성공의 시간을 반추하고 나무와 같은 생명력을 지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