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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 Dec 16. 2021

모과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다.

탄소 중립에 도움이 되는 길을 생각하며.

https://www.instagram.com/monymanyi



책상 위에 올려놓은 모과 한 알을 보며 커피를 홀짝인다.

향은 아직 진하네...


늦가을, 쌀쌀해진 날씨에 내 목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절로 모과차 생각이 나서  마트에 들러 유리 용기에 든 모과차를 냉큼 집어 들었다. 계산대로 가다가 시야에 들어온 과일 판매대. '세일!'하는 막 따온 듯한 향긋한 모과들의 모습을 보고 잠시 고민했다. 과일청은 시도해 본 적이 없으나 이 시대를 사는 주부는 네이버와 유튜브 선생을 믿었기에 모과 세 알을 꼼꼼하게 골라와 냉장고 옆 커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자, 이제 수제청 만들어 끓는 물만 부으면 만사 오케이. 처음으로 모과청에 도전해 보겠다는 딸의 야심에 친정어머니께서 부응하여 아끼는 도자기 용기까지 내어주셨다.

세 개의 모과에서 풍기는 달콤하면서 아주 살짝 쓴 그 이율배반적인 향이 좋았다. 좀 더 이 향을 즐기다가 썰어도 되겠어. 그리고 아직 완전히 익지 않았으니까.


내 시간만 빠른 줄 알았는데 모과의 시간도 빠르다. 며칠 되지 않아 푸르뎅뎅한 모습은 사라지고 노랗게 익다가 약간의 갈색 점도 생겼다. 이제 베이킹 소다로 빡빡 씻어 썰어야 하는데. 일상에 치이다가 며칠은 살짝 잊어버렸다. 냉장고 옆 커피 테이블의 모과 세 알.

다시 모과의 존재를 느꼈을 때는 이미 갈색 점의 수가 늘어나고 차지하는 면적이 넓어져 있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썰어야 할까. 커피 테이블에 다가가 모과를 손에 들고 그 달콤 쌉싸레한 향을 맡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왠일인지 모과의 초상화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얀 도화지를 깔고 모과의 프로필 사진을 찍었다. 세워서, 눕혀서, 옆으로 ... 정성스레 촬영했다. 그리고 포토샵을 열고 예우를 최대한 갖춰 모과를 그리기 시작했다. 갈색 반점은 최소화시키고 모델이 된 모과가 가진 형태와 색채에 집중했다. 배경으로 신사임당의 '가지와 방아깨비' 그림을 선택했다. 그림을 완성한 후, 인스타그램에 새로운 계정을 만들어 모과 그림을 첫 그림으로 올려 두었다. 딱히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가는대로 한 일이라고 치부했지만, 다음에 올 무언가를 위한 마음의 준비 과정이었다는 걸 모르지 않았을 터이다.


한 달이 넘었다. 그들 중 두 개는 갈색 반점에 점령당하고 곰팡이까지 피었다. 두고 볼 수 없어 봉지에 넣어 남편의 손에 들려 아파트 음식물 쓰레기 열처리장으로 보냈다. 나머지 한 개, 모델이 되어 주었던 모과만은 차마 그럴 수가 없어 지금까지 햇살 좋은 내 컴퓨터 책상 옆에 모셔져 있다. 과일을 썰지 못해 과일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경험으로 내가 얻은 것은 무얼까. 주부로서의 내 깜냥을 알고 다시는 야심을 갖지 않는 것만이 환경 보호와 탄소 중립에 도움이 되는 길임을 인식하자. 마트에 들러야... 아니 그냥 쿠팡에서 꿀모과차 한 병 주문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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