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은진 Aug 28. 2020

슬픔은 파도처럼

대장암, 아버지와의 이별 두 번째

  수술을 기다리는 동안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가장 큰 걱정은 깨어날 수 있을까 였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하고 갑작스레 떠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커졌다. 간호를 해 준다고 대전에서 날아와 준 언니와 조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나의 대화는 겉돌았다.


  드디어 침대에 누워 덜컹거리며 중앙 수술부로 옮겨졌다.

  “이제 마취할 거예요.”

  “네...”


  다시 병실로 옮겨지는 과정인가 보다. 그냥 잠깐 눈감고 뜬 것뿐인데... 수술이 끝났다.

  깨어나면서 배에 통증은 어마어마했다. 배에 총을 맞았다면 이런 느낌이었으리라... 마치 배에 불이 붙은 듯 뜨겁고, 신음소리가 끝없이 나올 정도로 아팠다. 고개를 계속 가로저으며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강한 진통제로 통증은 잦아들고 잠들다 깨기를 반복했다.


  오후 1시쯤 수술실로 들어갔는데, 정신이 들고 보니 늦은 밤 같다. 조카가 옆에서 정성껏 간호를 해 주고 있었다.

  “이모, 목말라? 입에 물 적셔 줄까?”

  계속 나의 상태를 체크하며, 일정 간격을 두고 누르면 약이 들어가는 무통주사도 적절히 해 주어 그 밤이 지나자 통증도 많이 사그라들었다. 참 고마운 시간이었다. 자그마한 아기 시절 안아주고 업어주던 그 꼬꼬마 아기가 어느덧 이렇게 자라서 오히려 나를 간호해 주고 있다니...


  이튿날 언니와 교대 후 쉬러 가는 조카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의사가 상태를 회진하며 다음 미션을 주었다. 소변 양 체크와 걷기였다.

  “하루 동안 10바퀴 꼭 걸으세요!!”

  말 안 듣는 아이에게 당부하듯 말하고 갔다.


  언니가 등을 받쳐주어 천천히 일어났다. 병실을 나갔다. 열 걸음 정도 걸었을까... 잠이 쏟아졌다. 나는 벽에 기대어 1~2분간 잠들었다. 깨나면 또 열 걸음... 그러기를 반복했고, 한 바퀴를 다 돌 즈음 땀이 났다. 어지럽고, 졸리고, 아팠다. 포기할까, 포기하고 나중에 다시 걸을까, 조금만 더 자고 일어나서 걸을까... 계속되는 유혹을 뿌리치고 마침내 한 바퀴를 돌아오니, 신기하게 몸이 가벼워졌다. 몸 안에 있던 독한 마취제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한 시간 정도 누워 잠을 자고 일어나서 다시 걷기를 했다. 그렇게 10바퀴를 제법 빨리 채웠고, 저녁시간엔 누워서 편안히 쉬었다.


  무통주사 때문에 어지럽고, 매스꺼워서 빼 달라고 했더니, 간호사가 놀랬다.

  “괜찮겠어요? 아플 텐데...”

  “이거 하는 게 더 괴로운 거 같아요.”

  회복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퇴원 예정일을 안내받고, 이것저것 검사를 진행했다. 퇴원 후 일주일 있다가 검사 결과와 항암 여부를 듣게 될 것이라고 했다. 퇴원 이틀 전에 링거를 빼니, 병원에 있는 게 조금 무색해졌다. PET CT 상 결과는 수술 부위와 목에 반짝임이 나왔는데, 갑상선이 좀 문제인 것 같으니 초음파를 하자는 것. 다른 장기에 전이된 것은 없었다.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종종 보내주는 아들 사진을 보니 빨리 집에 가고 싶어 졌다. 아들 얼굴에 그늘이 보였기 때문이다. 퇴원하는 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나를 보고 아들이 달려와 와락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엄마 옷(병원복) 벗었다.” 하며 좋아했다. 마음이 아렸다.

  집으로 돌아왔고, 언니들이 마치 어벤저스처럼 청소, 반찬, 설거지 등을 척척 맡아서 해 주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언니가 다시 서울로 올라가기 전날.

  화요일에 퇴원, 그리고 토요일 아침.

  가족 단톡 방에 아버지의 부고 소식이 올라왔다.


병원에 놀러온 아들


작가의 이전글 슬픔은 파도처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