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레몬>, 권여선
나는 주로 교과서에 등장하는 고전 작품만 읽고 접해왔다. 꽤 긴 시간 학교에 있었던 터라 나와 비슷한 상황의 사람들이 다 그러한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교과서에 등장하지 않은 작가들의 작품은 생각지도 않았던 새로운 영역의 느낌이었다. 교과서에 실린 작품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작품들이 매일 쏟아져 나왔고, 그들은 이미 문학계의 중진 또는 문학의 경향을 주도하는 그룹이 되어 있고 수많은 작품들이 독자들에게 읽히고 있다는 사실을 한강 작가의 맨부커상 수상을 통해 뒤늦게 실감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폭풍 검색해서 한강 작가의 책을 몇 권 주문하며 다른 작가의 작품을 검색하던 중 만난 작품이 권여선 작가의 작품이었다.
작년 독서 토론 모임을 통해 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를 읽고 토론한 기억이 있다. 단편「이모」에서 이모의 쓸쓸한 삶과 죽음이, 어머니와 남동생을 위한 그녀의 희생과 회한의 시간들이 마음 아팠다. 스스로를 끝까지 부여 잡기 위해 도서관을 오가던 길과 매일 앉아 책을 읽던 그녀의 자리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마지막 남긴 그녀의 유산(전세금) 상속이, 그 유언이, 그녀의 마지막이자 유일한 선택이 애처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되는데 스스로를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만 할 것 같은 마지막 세대, 나의 세대의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단편집에 실린 다른 작품들에서도 얘기하는 시대가 내가 살았던 세상과 다르지 않았다. 어떤 것은 너무나 내 삶의 궤적과 같아서, 지난 삶의 인상들을 콕콕 짚어내기도 해서 놀랐었다. 전통과 효를 중시하고 남녀의 성역할을 고집스럽게 가지고 있던 세대와,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고 기존의 여자와 남자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자유로운 삶을 만끽하는 세대 사이의 낀 세대인 우리. 결혼을 하면서 시부모를 당연히 봉양해야 하는 마지막 세대이며 자식들에게 부모의 부양의 의무를 요구할 수 없는, 정확히 우리 세대의 삶을, 어린 시절과 성인이 되어가는 모습들을 작품들에서는 보여주고 있었다. 그 세대의 인물들의 깊은 고뇌, 삶을 살아내는 방식이, 그 쓸쓸함과 허무함의 근원이 낯설지 않다는 것에 더욱 깊이 공감하며 읽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차후로 서점에 가면 새로이 만난 작가들의 작품에 주목하며 읽게 되었다. 시대도 낯선 1930년대, 일제강점기, 6.25전쟁의 이야기들보다 더 나의 머릿속을 파고 들어왔다. 오래오래 그 여운을 곱씹으며 다음 작품을 만날 때까지 소설 속 인물들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반복하곤 했었다.
코로나로 도서관이 문을 닫고나서는 주로 서점에서 책을 만났다. 국내 소설 코너를 기웃거렸고 작품을 만나고 읽고 여운을 안고 돌아오기를 거듭했다. 그러던 중 만난 작품이 권여선 작가의 <레몬>이었다. 검은 표지에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상큼한 레몬 하나가 흐릿하게 자리잡은 책 표지가 무언가를 말해주는 듯했지만, 내용처럼 복수의 주문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드디어 오랫동안 열리지 않던 문이 열리고 노란 빛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듯했다. 노란 천사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레몬,이라고 나는 의미 없이 중얼거렸다. 복수의 주문처럼 레몬, 레몬, 레몬이라고.(p.97)
노란 원피스를 입은 고등학생 해언이 어느날 살해된 채 자신의 집에서 세 정거장 거리의 공원에서 발견되고, 언니를 수족처럼 챙기던 동생 다언의 삶은 망가진다. 같은 반 ’한안만우우우’, 나름 일머리가 있는, 스쿠터로 치킨을 배달하던 둔한 소년은 범인으로 몰리고 소년의 여동생의 알리바이 증명은 묵살당한다. 죽은 소녀를 차에 태웠던 신정준은 정학을 받고 유학을 떠나고 신정준을 좋아해서 죽은 소녀를 질투했던 윤태림, 그녀는 모든 것을 감싸 안으며 10년 뒤 신정준으로부터 결혼이라는 나쁘지 않은 거래을 제안 받는다.
한 여학생의 죽음과 관련된 많은 관계자들. 작품에서 말하려는 것이 무엇일까. 청소년의 비행 또는 방황일까. 해결되지 않은 성폭행 사건 또는 살인사건과 납치사건들의 실태일까. 언니의 죽음으로 인해 망가진 동생과 피해자 가족의 삶일까. 작가의 말대로 ‘누구나 지닌 거친 삶’의 적나라한 실상을 보여주자는 것이거나 ‘평(平)하지 못한 삶의 두려움’을 이야기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작품이 내게 와닿는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고 어쩌면 이미 알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모두는 각자 '의미심장하게 굴곡'진 삶을 살아왔고 의식 저 너머에 그것들은 언제든 나를 끌어당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작은 틈새 하나라도 보일라 치면 비집고 나올 틈을 엿보며 나를 사로잡고 있는 내 속의 무언가, '당연하면서도 놀랍고 이상하면서 궁금하고 두려우면서 매혹적'인 것들. 그렇지만 찰나의 삶의 의미들을 대개는 쉬이 잊혀지고, 의미는 있으나 드러냄은 복잡하여 큰 용기와 정교한 세공을 필요로 한다.
나는 궁금하다. 우리 삶에는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걸까. 아무리 찾으려 해도, 지어내려 해도, 없는 건 없는 걸까. 그저 한만 남기는 세상인가. 혹시라도 살아 있다는 것, 희열과 공포가 교차하고 평온과 위험이 뒤섞이는 생명 속에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의미일 수는 없을까. (...) 찰나에 불과한 그 순간순간들이 삶의 의미일 수는 없을까.(p.198)
의미심장하게 굴곡진 삶을 드러내기에 글이라는 형식은 정제된 구성을 통해서 이상적으로 보여주기에 그런대로 적합하다. 소설적 상상력이 없는 그 세계는 너덜거리고 무미하고 너댓개의 콘센트가 꽂힌 멀티탭의 전기선이 마구 엉킨 것처럼 어지럽고 정돈되지 못한 것일테니까.
작가의 섬세한 손길은 그러한 모든 이들의 아픈 삶을 다독다독 건드린다. 쉽게 그려내기 어려운 인물들의 평하지 못한 삶의 모습들까지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저마다 놀랍고 궁금하고 두려운 이야기들은,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삶의 갈피 갈피엔 언제나 불행이 가득하지만, 살아 있는 한 삶은 계속된다는 것,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웃을 수 있고 기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간간이 확인시켜준다. 여전히 "우리의 생명은 팔딱"이고 있고, 또한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듯이.
오늘도 과자가 탔다
되는 노릇이 하나도 없군요 우리 베티 번 씨
......
-레몬과자를 파는 베티 번 씨 (p.68)
되는 노릇이 하나도 없지만 생명이 팔딱이는 한 삶은 이어져야 하기에, 그러다 간간히 웃을 수도 있고 기쁠 수도 있기에 남겨진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간다.
완벽한 하루가 없듯 완벽한 삶도 없다. 평하지 못한 삶을 수면 밑바닥에 가둔 채 오늘도 되는 노릇이 없는, 그러다 간간이 웃는 다언의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