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쓰기에 임하는 나의 자세
내가 쓴 글의 첨삭을 받았다. 문단의 순서와 첫 문장에 대한 의견 다음에 아쉬움이 따라붙었다. 좀 더 재미있는 사건이 있었으면 한다고. 그런 사연을 못 쓴 것인지, 안 쓴 것인지, 혹은 없는 것인지 물음표가 따라붙었다.
사건이 일어나고 다음에 어떤 파격 또는 반전이 아쉽다. (엉망이 되어)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거나, (행사 장소에서 그로 인한) 어떤 일이 벌어졌다거나, (열심히 했는데) 혹평이 이어졌다거나, (생각과 행동 사이의 충돌로 인한) 몸의 거부, (그에 따르는) 후유증이 있었다거나……, 그런 것들이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했다. 역시 ‘범생이’ 타입이라고 하며 글의 ‘장점’이자 ‘단점’이라는 덧붙임이 있었다. 그냥 무난하게 읽힌다, 그러나 맛이 없다.
첨삭 글에 이은 평가를 듣고 난 후 그동안 쓴 글에서 보이는 나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답답할 정도로 질질 끌려가는 모습이 있었다. 얘기 들은 대로 화끈한 ‘한방’이 없는, 눈에 띄지 않는 소심함이 글에서 내내 보였다. 확인과 함께 글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졌다.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어떤 것이 맛있는 글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떤 부분을 어떻게 고쳐야 글이 맛있어지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글을 통해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나를 위로하자는 것이 글을 쓰게 된 이유였다. 되도록 솔직한 나를 담고 싶었고 그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렇다면 지나온 삶의 태도가 문제가 있던 것이었을까에 이르렀다. 우선 찾아보자고 생각했다. 죽 읽어 보니 내 글에서 큰소리 내지 않고 숨죽여 살아온 삶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았다. 나를 망설이게 하고 파격이나 단호함을 허락하지 않는, 주저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밝고 호탕했다고 생각했던 결혼 이전의 나의 기억 속의 삶의 모습과 태도는, 그 당돌함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 내 삶의 회고는 시작도 안 했어’라고 위로했지만, 더 쓴다고 다른 파격이 보이기는 할까 걱정이 생겼다.
’주눅 들다’, ‘조심스럽다’, ‘은근하다’, ‘삼가다’ 등,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몇 단어를 찾아보았고, 나의 글이 ‘삼가다’와 ‘주눅 들다’ 사이의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만큼 살아왔는데 말하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 생각했다. 왜 나는 아직 눈치를 보고 있나. 조금 더 나가도 되는 데 늘 주저하는 대목은 무엇이 걸려서일까.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것이, 나를 위로하고 내 존재를 드러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작한 글쓰기였다. 초라하고 숨죽인 모습만 드러나는 것 같아 심란해졌다. 그런 숨죽인 모습을, 첨삭해주는 선생님은 ‘범생이’라고 표현한 것이지 싶었다. 나의 불량기가 필요했다.
지난 30년, 결혼 이후의 삶을 구분해 보았다. 나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이들의 성장 단계를 기준으로 구분했으나, 구분이 무의미하게 모두 하나였다. 결혼 이후의 나는 시댁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늘 ‘을’의 위치에 스스로 서 있었다. 누구를 봐도 움츠러들었다.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했고 책 잡히지 않아야 했다. 싫은 내색을 드러내서도 안 되었다. 웃지 못할 상황과 웃을 수 없었던 삶에서 만들어진 나의 어색한 표정은 바로 싫은 내색으로 치환되어 해석됐다. 시댁 식구들은 나의 표정을 그렇게 해석했고 못마땅해했다.
브런치를 시작하고 글을 쓰며 여러 번 망설였다. 글에서 드러나는 관계가, 사건이, 사고가 누가 봐도 바로 나인 줄 알 것 같았다. 혹시 보면 어떡하나, 누군가 전달하면 어쩌나 걱정했다. 글에 담긴 나의 아팠던 사연이 지금에 와서도 그것을 말했다고 다시 책을 잡힐 것 같아 편치 않았다. 다 늦게 혹시라도 집안 분란을 만드는 것은 아닌지 또 다른 자아가 한몫 단단히 거들었다.
필사하던 중 발견했던 니체의 말이 떠올랐다. “인식에 이르는 길 위에서 그렇게 많은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없다면 인식의 매력은 적을 것이다.” 다른 이들 때문에 말을 조심하고 주눅 들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나를 부끄럽게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은유가 말한 부끄러움과 대면하는 ‘용기 구간’, 그 길이가 얼마나 될지 달려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해서 기죽지 않고 끝까지 나를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보기로 했다. 그것이 내 글에 품위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나를 속 시원하게 해 줄 수는 있겠지 싶었다.
첨삭이 계기가 되어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내 글의 문제점을, 나의 문제점을 살피고 다독일 수 있었다. 해결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실마리 정도는 끄집어낸 듯했다. 이제부터는 당당하게 쓸 것이다. 글로 속을 시원하게 할 테다. 흉을 보면 어떤가, 나팔 들고 광고하듯 흉을 만들고 꾸미는 것도 아니고, 최소한 거짓을 얘기하지는 않을 테니. 숨죽이고 있었던, 지나치게 삼가고 주눅 들어 잊고 있던 나를 얘기할 테니. 그렇게 ‘불량한’ 나를 다 까발리고 ‘범생이’로 숨죽이며 살았던 나를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