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myi Jung Sep 27. 2022

여행의 비효율성

효율성을 중시하는 남편이 Vietri Sul Mare에 갔던 일에 관하여

불길한 징조 : 우리는 그때 더 신중했어야 했다.

+39 338 220 8598

 평소라면 당연히 받지 않았을 번호로 걸려온 전화.

이탈리아 유심으로 생활한 지 일주일이나 되었기에,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받는다.

"Pronto. scusi, parli inglese?"


그냥 "Hello?" 하고 받아도 될 것을, 항상 짧은 이탈리아어로 받아치곤 했다. 나의 착각일 수 있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은 다짜고짜 영어를 들이밀 때 보다 한국인인 나를 훨씬 더 친근하게 받아주곤 하였다.

"We have some drivers who caught the covid, anticipate your pick up time at 5:45 am"


[밀라노-알바-피아첸차-모더나-피렌체-토스카나-포지타노-로마] 빡빡한 일정 중 유일한 휴양지였던 포지타노에서 새벽 5시 45분에 셔틀을 타고 나와야 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Okay, then can you refund the ticket?"


우리는 논의 끝에 포지타노에서 페리를 타고 살레르노로 가서, 살레르노에서 기차를 타고 로마로 향하기로 하였다. 너무나 클리셰 같은 표현이지만, 이때 우리는 분명 더 신중했어야 했다.


희망찬 신혼 : 우리는 살레르노로 간다.

 남편의 MBTI는 ESTJ, 아내는 그에 못지않은 ENTJ로 우리 부부는 무엇 하나 쉽게 넘어가는 일이 없는 꼼꼼한 인간들이었다. 하지만, 방금 막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떠난 두 사람은 여태껏 살아온 인생 중 가장 너그럽고 포용적인 상태였다. 몇 유로, 몇 분 정도 손해 보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라면 가지 않을 길을 갔다. 계획에 어긋나더라도 옆길로 차를 몰았다. 그렇게 들르게 되었던 볼로냐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맛있다는 젤라토와 그라니따를 먹었고, 몬테풀치아노에서는 너무나 아름다운 전망을 가진 전통 깊은 카페를 들르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살레르노로 가기로 했다. 원래 같았으면 포지타노에서 바로 로마로 갔겠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는 여행과 샛길로 빠지는 재미를 알아버린 우리에게 살레르노는 또 다른 설렘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설렘과 "다 잘될 거야"라는 마음가짐으로 기차표를 좀 더 일찍 예매하지 않았던 것. 그래서 우리는 좀 더 애매한 시간에, 좀 더 시간이 걸리는 로마행 기차표를 예매하게 되었다.



행복한 저녁 : 여기 접시 왜 이렇게 예뻐?

 포지타노의 저녁, 호텔 포세이돈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인 Il Tridente에서 나름 신혼여행 저녁 식사의 하이라이트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뷰, 맛있는 음식, 좋은 와인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내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접시였다.



안 그래도 포지타노를 여행하면서 쨍한 색깔의 레몬이 그려진 접시에서 눈을 떼지 못했던 아내는, 접시마다 그려진 토끼며 물고기며 동물 그림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조심스레 접시 뒷면을 살펴보던 아내는, Vietri Sul Mare라는 살레르노 근처 동네의 Ceramica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우리의 목적지는 그렇게 얼추 정해지고 있었다.


홀린 듯 간다 : 버스 타자. 택시 타자. 뛰자.

 포지타노에서 살레르노까지 가는 페리는 좋았다. 출항시간, 도착시간도 잘 맞았다. Vietri Sul Mare에 아내의 친한 언니의 친구 부모님이 하는 그릇 가게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연락처도 확보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살레르노 역에 도착해서 짐을 맡기고 Vietri Sul Mare로 가는 기차표를 구매했다. Vietri Sul Mare 역에서 보는 뷰도 예쁘다고 하니 더더욱 기대가 됐다.


예정된 출발 시각을 기다리며 전광판을 보던 우리는 'cancellazione'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번역기를 돌려보지 않아도 알았다. 다음 기차는 20분 뒤. 우리는 플랫폼에 가서 기차를 기다렸다. 올 시간이 지났다. 방송에 귀를 기울인다. 그래, 그럼 그렇지. 또 취소다. 우리는 밖으로 뛰쳐나가 택시를 찾았다. 택시가 없었다.


구글맵을 켜보니 그곳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 버스를 기다린다. 동네 사람들 모두가 기차역에서 나와 다 함께 버스를 기다리지만, 버스는 역시나 오지 않는다. 다급한 마음에 다시 기차역으로 택시를 잡으러 간다. 아내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탄다. 멋진 여자. 왠지 이 택시, 기차역으로 콜을 받고 가던 중에 우리에게 납치당한 것 같지만 상관없다. 우리는 기차 시간에 늦지 않게 돌아오는 게 중요했다.


마음이 급했다. 가게에 도착했지만, 문은 굳게 잠겨있고 불은 꺼져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간 게 분명해. 아내는 가게 옆에 있던 건물 문을 열고 들어갈 기세였다. 나는 차분히 가게에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문이 열렸다.

"Are you friend of Manu?"

친절하게 맞아주신 친구의 부모님 덕분에 우리는 Vietri Sul Mare의 한 수제 공방에서 정말 예쁜 접시를 사게 되었다. 사실 진짜 사고 싶었던 동물 접시를 파는 Ceramica 가게는 시간이 없어 가보지도 못했다.

 와중에 누의 부모님은 그릇 가격도 할인해주시고 살레르노 역으로 가는 버스 티켓도 챙겨주셨다.


찾아온 현타 : 뭔가... 부끄러워!!

 어찌저찌 구매를 마치고, 다행히 제시간에 버스를 타고 살레르노로 돌아오는 길, 아내가 말했다. "뭔가... 부끄러워!!"


여기서 잠깐, TMI를 말하자면 남편은 학부시절 내내 최적화와 효율성에 대해 공부했었다. 어떤 일이든 효율을 중요시했고, 어떤 물건이든 가성비를 중요시했다. 생각해보면, Vietri Sul Mare에 가는 것은 비효율성의 극치였다. 가지 않는다고 결단했어야 할 순간이 다녀올 수 있는 방법보다도 많았다.


하지만, 남편은 알았다. 자기만큼 효율적인 방식을 중시하는 아내가,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위험할 것을 알면서도 불타는 집에 소중한 것을 구하러 가는 소방관의 모습 같았달까.

다급해 보였고, 무모해 보였지만, 결의에 차 있었다.


그런 아내가 귀여웠다. 그래서 나는 평소처럼 챌린지 하기보다는 아내를 돕기로 마음먹었다. 아마 내가 무엇인가 갖고 싶다고 했다면, 아내도 똑같이 엄청난 관용을 베풀었을 거다. 그릇을 갖고 싶어 하는 아내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그래서 지금 : 이렇게 예쁜 접시는 한국에 없을 거야!

 성수로 돌아온 아내는, 그 뒤로 모든 음식을 이 접시에 담아서 내곤 한다.


이탈리아에서 사 온 치즈도,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발사믹을 뿌려 접시에 내고 간단한 비스킷을 꺼내도 예쁜 접시에 담아낸다. 예전에는 접시 사이즈를 음식에 맞춰 냈던 것 같은데, 이젠 별로 중요하지 않은가 보다.


이 그릇이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 곁에 있어줄진 모르지만, 그릇을 사기 위해 Vietri Sul Mare로 향하던 아내의 모습은 오래오래 내 마음에 남을 것 같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 잘 아는 우리가, 그 많은 비효율을 감수하고 다녀왔다는 사실 역시, 그릇에 오래도록 얼룩처럼 남아있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바다에서 몇 살까지 튜브를 껴도 되는걸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