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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씨 May 21. 2024

나는 000 이에요.

< 나는 기혼에 유자녀예요.>

 2011년에 근무하던 회사의 팀장님께 소개를 받아 남편을 만나 이듬해 결혼을 했어요. 결혼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거나 계획해 본 적이 없어요. 그땐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던 걸까요? 

 직장 생활에 겨우 안정을 찾았을 즈음, 오래 꿈꾸던 회사에 합격하여 이직을 하게 되었어요. 미래에 대해 구체적으로 비전을 갖기 시작했는데, 사실 꿈꾸던 일도 적성에 맞지 않아서 힘들었어요. 

 결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을 하며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머물렀어요. 그땐, 많이 우울했던 것 같아요. 너무나도 갑작스런 변화였고 직장을 잃은 내가 출산 후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던 시기예요. 불안함을 이기려고 자격증 공부를 했어요. 인천에서 강남까지 한 여름 무거운 몸을 이끌고 학원에 오가던 기억이 나네요. 

 아이를 낳은 후에도 많이 힘들었어요. 내 또래 많은 산모들과 달리 산후조리원 대신 곧바로 집으로 퇴원을 했어요. 돌이켜보니, 나 자신에게 참 가혹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산후조리원에 가는 게 너무 호사스럽고 낭비라고 생각했거든요. 

 아이가 밤에 잠을 자지 않아 많이 힘들었어요. 새벽 세네 시까지 우는 아이를 안고 방안을 빙글빙글 돌 던 게 생각나요. 한 명이라도 잘 자야한다고 남편은 안방에서, 나는 아이와 복도 끝 방에서 지냈어요. 그런 주장을 한 건 바로 나였답니다. 도대체 나는 왜 그랬을까요? 돈을 벌지 않기 때문에 육아는 전부 내 부담이라고 스스로 단정을 지었던 것 같아요. 바보 같은 생각이었죠.

 매일 아이만 바라보고 살 순 없어서 방송대 공부를 다시 시작했어요. 아이를 보며 틈틈히 이어폰으로 인강을 듣고 열심히 공부를 했어요. 출석 수업을 하는 날은 아이를 맡기고 외출을 했어요. 그 시간이 저에겐 너무 소중했답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모든 학기 장학금을 받고 졸업을 했어요. 언젠간 전공을 살려 다시 일할 거라고 몇 번이나 다짐을 했더랍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면서 저도 집밖으로 나가기 시작했어요. 평일 오전에 하는 영어회화 모임에 꾸준히 나갔어요. 카페에서 영어로 말하는 내 모습은 집에서의 모습과 많이 달랐을 거예요. 나는 많이 웃었고, 자신감이 있었거든요. 

 영유아를 대상으로 출강 강사일도 했어요. 교육도 열심히 듣고, 마음이 맞는 동기들끼리 따로 모임을 만들어 스터디처럼 수업 연구를 했어요. 결국 유능한 강사는 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 일을 그만두고는 오래 쉬었어요. 육아와 더불어 아이의 학습에 에너지를 쏟아 부었던 시간이었어요. 육아서를 많이 읽었고 이른바 '엄마표 00'을 한다고 난리였죠. 학습계획표를 짜고 저녁엔 육아 일기를 가장한 '엄마표 일지'같은 걸 쓰기도 했어요. 

 책 육아를 한다고 아이와 시간이 나면 도서관에 가서 수레로 책을 실어 날랐어요. 열심히 책을 읽어주었지만, 아이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오히려 책에 빠진 건 바로 나였답니다.

 당시 언어천재로 유명한 조승연의 어머니가 쓴 책을 읽다가 말 그대로 책을 던져버렸던 기억이 나요. 지겹다, 이건 더이상 내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슷한 시기에 정아은 작가의 '엄마의 독서'라는 책을 만났어요. 육아서 같은 제목이지만 내용은 달랐어요. 작가가 읽었다는 책을 모두 찾아 읽었어요. <엄마됨을 후회함>, <이갈리아의 딸들> 이런 책들을 찾아 읽으며 후련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동시에 한없이 답답하기도 했어요. 내 삶에 실질적인 변화는 일어날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아이를 통해 맺은 엄마들과의 관계가 삐걱이기 시작했어요. 서로의 집을 드나들며 자매처럼 지내던 무리에서 홀로 떨어져 나왔어요. 엄마들과의 만남은 즐거웠지만 동시에 진이 빠졌어요.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며 쌓아온 관계는 생각보다 쉽게 무너졌어요.

 다시 혼자가 되어 좋기도 했지만, 동네에서 수시로 예전 무리와 마주치는 일은 힘들었어요. 그러다 코로나19가 닥쳤어요. 

 합법적으로(?) 집에 스스로를 격리시킬 수 있어서 좋았어요. 한동안은요. 그러다 어느 날 집앞 커피숍에 갔다가 내가 이상해졌다는 걸 깨달았어요. 간단한 음료를 주문하는 일도 힘들었거든요.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어요. 

 무언가 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도서관 봉사를 시작했어요. 오랜만에 집밖에 나왔다는 즐거움도 잠시, 업무에 익숙해지는 동안 힘들었어요. 업무를 가르쳐주는 기존 봉사자의 태도가 유독 나에게만 공격적이라고 오해하고 괴로워하기도 했어요. 다행히 시간이 흐르며 업무에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스스로의 유능함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반면 아이와의 관계는 날이 갈 수록 힘들었어요. 학습만 강요하는 엄마의 태도에 아이는 반항을 하기 시작했고, 그걸 보며 세상이 무너진듯 엄청난 좌절감을 경험했죠. 무언가 돌파구를 찾아야 했어요. 그러다 농촌유학을 알게되 아이와 훌쩍 남쪽에 있는 농촌으로 이사를 갔어요. 

 농촌 유학을 하면서 2년의 시간을 보냈어요. 아이와 저에게 도움이 되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학습에 대한 부담과 막연한 불안감은 한결 줄었어요. 물론, 좋은 기억만 남은 건 아니에요. ' 도심에서 벗어나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며 꿈같은 시간'의 이면에는 고립과 낯선 환경에 대한 적응도 만만치 않았답니다. 물론, 저의 성격도 한 몫했죠. 

 농촌 유학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도시로 돌아와 새학기를 맞아 벌써 5월이 되었네요. 아이는 학교 생활에, 저는 새로 시작한 아르바이트에 각자 적응해 나가며 지내고 있어요. 항상 그러했듯이 웃는 날도, 우는 날도 있어요. 

 앞으로도 기혼이자 자녀를 가진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것 같아요. 바람이 있다면 좀 더 많이 웃고 조금만 우는 거예요. 울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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