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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향노루 Feb 07. 2021

살아도 여행지 같은, 미워도 미워하고 싶지 않은

[사향노루의 City Profile] 서울, Seoul

어려서부터 서울을 좋아하지 않았다. 안산에 사는 나에게 서울은 왕복 3시간은 걸리는 꽤 먼 곳이기도 했고, 정신없는 서울의 분위기가 썩 내키지 않았다. 형이나 친구들은 옷을 사기 위해 서울 원정길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나는 ‘서울이라고 뭐 대단한 거 있나’ 식이었다.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대학교에 가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마도 대학시절 서울에 대한 기억이 충무로로 점철돼있기 때문인 것 같다. 보도사진학회에서 필름 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필름을 사러 종종 서울 원정을 떠나곤 했는데, 한대앞역에서 출발하는 우리는 앉아서 가면 엉덩이가 쪼개지기 직전에 겨우 내린다는 것이 고통이었고, 앉지 못하면 말 그대로 억겁의 시간이었다.


SIGMA fp + C 45mm F2.8 DG DN


그런 내가 서울에 살게 될 줄은 몰랐다. 정확히는 모른 척한 셈이다. 전공으로 보나 세상 돌아가는 순리로 보나 나는 서울에서 직장을 얻게 될 운명이었지만 서울 살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첫 직장이 있던 성수를 안산에서 매일 오간 지 한 달 만에 나는 내가 서울에 살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놀랍게도 10년째 서울살이를 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나는 이곳이 내 터전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여전히 나는 서울의 대부분 지역에 대해 무지하고, 서울의 현실이 내 삶과는 동떨어진 저 세상 이야기처럼 들린다. 장기 여행자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나의 서울살이는 여행기를 모은 시티 프로필 시리즈에 포함될 자격이 있다.


NIKON Z6 + A 50mm F1.4 DG HSM / Sony a7R2 + A 35mm F1.2 DG DN


서울은 그야말로 양면의 도시다. 물이 반쯤 차있는 컵을 보며 두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서울의 특성은 나쁘게 보려면 한없이 나쁘고 좋게 보려면 한없이 좋다. 서울의 특성 중 가장 나를 오락가락하게 만드는 것은 ‘많다’는 점이다. 참 풍부하기도 하고, 투머치 하기도 하다. 처음 서울살이를 시작했을 때는 그 풍부함이 참 즐거웠던 것 같다. 큰 맘먹고 와야 했던 서울의 곳곳을 산책처럼 돌아다닐 수 있었고, 안산같이 애매한 도시에서는 누릴 수 없었던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었다. 특히 한강을 따라 자전거 라이딩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서울이 주는 가장 큰 혜택 중 하나다.


SIGMA fp + C 45mm F2.8 DG DN / SIGMA fp + C 24mm F3.5 DG DN
SIGMA sd Quattro + A 18-35mm F1.8 DC HSM

서울이 터전인 덕분에 내가 지금 즐기는 것들도 더욱 쉽게 즐길 수 있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마트와 지하철로 20분 안에 갈 수 있는 여러 백화점들은 내 식생활을 풍요롭게 했고, 수도 없이 많은 카페, 식당, 영화관, 전시회 등이 내 여유 시간을 즐겁게 해 줬다. 서울이 주는 문화적 혜택이 한국의 그 어떤 도시와 비교해도 우위에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한 편으로 서울은 떠날 수만 있다면 언제든 떠나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서울에 살면서 항상 느끼는 감정은 위압감이다. 어디를 가든 그득그득한 사람들, 빼곡하게 들어찬 건물들은 투 머치의 극치이고 그 안에 서 있는 내가 도시의 구성원이나 도시의 가치를 영유하는 사람이 아니라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소모품처럼 느껴진다. 서울이라는 도시에 서서히 잡아 먹히는 중이라고 해야 할까? 서울은 모두가 성공을 꿈꾸며 몰려드는 곳이지만, 성공이 우선순위가 아닌 나 같은 사람에게는 곳곳에 넘쳐흐르는 그 욕구들이 부담스럽고 당혹스러울 따름이다. 나처럼 고리타분한 선비한테 서울은 동화될 수 없는 영원한 객지다. 그래서 서울에 대한 감정은 항상 냉탕과 온탕을 오간다.


Lomo LC-A+ + Kodak ProImage100 /
SIGMA fp + C 100-400mm F5-6.3 DG DN OS / NIKON D5600 + A 24-70mm F2.8 DG OS HSM


별안간 서울을 떠나 제주로 이주를 한 이효리가 2017년 4년여의 공백을 깨고 ‘서울’이라는 노래를 선보이며 JTBC 뉴스에 출연해 자신 행보에 대해 답했었는데 지금의 내 심정이 그와 같지 않을까 싶다. “(제가) 서울을 미워했었더라고요. 서울을 나쁘게. 떠나고 싶다? ……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까 서울이 어둡고 나빴던 게 아니라 서울에 살 때의 제가 어둡고 답답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더라고요.” 나 역시도 냉정히 나를 돌아보면 서울이 문제라기보단 내가 문제인 듯하다. 다른 계층이라 느껴지는 이들도 별로 없고 그걸 느낄만한 계기도 없이 학생으로 살았던 안산을 떠나, 사회인으로서 서울에 머물며 느끼게 되는 타인과의 격차에 의연하지 못한 것이 결국 내가 서울에 압도당하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SIGMA sd Quattro + A 35mm F1.4 DG HSM


살아도 여행지 같은, 밉지만 미워하고 싶지 않은 이 도시에 나는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머물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서울을 조금 더 아름답게 느끼기 위해 더 어른스러운 내가 되는 방법을 고민 중이다. 내가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는 리스본이나 런던에도 그곳이 지겹고 떠나고 싶은 사람은 분명히 있다. 사는 곳이란 그런 것이다. 서울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된다면, 그땐 내 마음이 온전히 평화를 누리고 있다는 뜻 아닐까?


Olympus Pen FT + Ilford PANF50
SIGMA fp + C 45mm F2.8 DG DN
서울, 한강, 밤 - SIGMA fp + C 45mm F2.8 DG D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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