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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냥 Oct 11. 2019

아이의 투병이 엄마를 움직였다

생애 첫 운전, 그리고 종교

지난주 16년 장롱면허에서 졸업했다. 연수를 마치고 운전연습을 홀로 더 하다가 내년에나 뒷자리에 애들을 태워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연수를 마친 바로 다음날, 작은아이의 이비인후과 진찰을 위해 빗속을 뚫고 초보운전을 본격 개시했다.


아이까지 태운 생애 첫 나 홀로 운전이었다. 차선 바꾸기는 왜 이리 어려우며 비는 왜 이리 많이 오는 건지. 늘 도보로 다니다가 차로 이동하려니 알던 길도 모르겠는 아노미 그 자체였다. 주차 자리를 못 찾아 집까지 되돌아가는 똥개 훈련을 30분간 반복한 (참고로 병원과 집은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다) 끝에 병원과 약국, 어린이집에 차례로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이 날, 운전에 대한 자신감을 0.1g 적립했다.


사실 운전은 하면 좋겠지만 꼭 필요하지는 않은 존재였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대형마트와 아울렛 백화점이 있었고, 교통도 나쁘지 않고, 남편이 척척 운전대 잡고 이동해주니 장거리로 이동할 일이 생기면 그저 옆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거나 아이들 사이에 앉아 열심히 간식을 나눠주기만 하면 됐다. 그 외에 직접 겪은 적은 없지만 인명사고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있는 것, 그리고 면허를 딴 후 단 한 번도 운전경험이 없었다는 사실도 그 간의 운전 기피에 한몫했다.


그러나 내 사랑스러운 아들들은 엄마의 나태를 두고 보기 싫었던 모양이다. 올 초, 아이들의 병원과 회사와 시댁을 택시와 대중교통으로 오가며 발에 불이 나게 뛰어다녔다. 게다가 큰아이 발병 직후 정기검진을 위해 매주 타는 택시비만 한 달에 15만원이 넘어갔다. 배려심 넘치는 기사님의 차에선 아이를 부둥껴안고 검사결과지만 쳐다봐도 됐는데, 가끔 지 않은 기사님 차에 탈 때면 아이 관련하여 잔소리를 듣거나 길을 일부러 돌아가거나 난폭운전 등으로 불안함과 함께 이동해야 했다. 운이 나빠 왕복으로 내내 시달린 날이면, 해당 기사님을 패스할 수 있게 해 준 카카오 택시의 기능에 감사해하곤 했다.


이렇듯 나는 엄마가 된 지 8년 차가 돼서야 운전이 갈급해졌다. 그동안 남편과 아이들이 건강해준 덕에 별 탈없이 두 다리로 잘 다녔지 싶다. 작년 그 매서운 한파 때 씽씽이를 타고 도보로 어린이집을 다녔던 내 아가들. 당시에는 아이들의 씩씩함이 마냥 고마웠는데, 지나고 보니 그때 손실된 체력이 편도염과 자반신염의 원인이었을까 싶어 미안한 감정뿐이다.. 후회는 접어두고, 빠른 시일 내에 동네 운전을 졸업해서 서울 대도시 운전까지 마스터해야겠다.



그리.. 지난 한 달간 도둑고양이마냥 홀로 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가다가 드디어 예비신자 교육에 참석하게 되었다.


사실 나의 친정은 양가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다. 친가 쪽은 개신교의 전도사를 배출할 만큼 신앙심이 깊었고, 외가 역시 온 일가친척들이 성당에 다니며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셨다. 사촌역시 동일했다. 그러나 나와 언니, 남동생만 꿋꿋하게 비종교인으로 살며 일요일은 휴일이라 외왔다. 그중에서도 내 목소리는 으뜸으로 컸다. 종교는 나약한 인간이 기댈 곳 없어 만든 허구의 존재라며 가장 큰 목소리로 나불거렸다.


그러나.. 삼 남매 중에서 내가 제일 먼저 무너졌다. 역시 아들이 계기였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운 일들이 몰아닥쳐도 가족에게 의지하며 잘 이겨내 왔는데, 죽음이라는 단어만큼은 내 능력 밖이었다. 본래 생각이 많고 궁금한 것이 많았던 큰아이에게는 자신에게 닥친 시련이 고통 없는 죽음으로의 한 발자국 이었던 것 같았다. 통증도 없는데 엄마는 자꾸 울고, 피는 한 사발을 뽑아가서 빈혈이 오고 , 소변은 안 나오고, 먹지 말라는 음식과 이상한 약들로 변해가는 외모는 8세에게 쉬이 납득하기 어려운 현실이었을 것이다. 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아들을 안심시키고 싶었다. 너는 괜찮을 거라고 확신을 주고 싶었다. 내가 감히 할 수 없는 그 믿음을 절대자를 통해 주고 싶었다. 아가야. 너의 삶은 죽는 게 끝이 아니야. 게다가 아직 많이 이르단다. 그분께선 네가 엄마랑 좀 더 함께하길 원하셔.


병원에 있는 내내 기도하고 빌었다. 아이를 낫게 해 주실 수 없다면 지금보다 좋아지게만이라도 해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재발로 아이 상태가 흔들릴 때마다 계속 울며 외쳤다. 종교 없이 살았던 나의 오만함을 꾸짖는 거라면 아이에게 하지 말아 달라고, 내가 모든 죗값을 받겠노라고. 끊임없이 빌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조금씩 아이 상태가 안정되어가고, 슬슬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한두 시간 정도는 외출해도 괜찮은 시기에 도달했다. 하지만 막상 내 발로 성당을 찾아가려니 이 또한 쉽지 않았다. 종교적 표현을 빌리자면 사탄(?)의 공작이 분명한듯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1. 큰맘 먹고 아이들과 성당을 찾아갔던 월요일. 성당이 쉬는 유일한 날.

2. 그다음 주에는 아이가 잠시 아파서 자리를 뜰 수 없었고,

3. 아이와 초등 미사를 보러 가기로 한날, 성당 초등캠프가 있다며 미사가 취소되었단다.

4. 그다음 주.. 드디어 성당 관계자분을 만날 수 있었으나 원장수녀님의 부재. 게다가 관계자분의 오해로 비신자는 미사를 드릴수 없으니 집으로 가셔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5. 그다음, 드디어 원장수녀님과 약속을 잡고 남편과 함께 이동하다가 접촉사고가 나서 보험 대물 처리.. 진짜 성당 다니지 말까 백번 고민했다.


그러나 아이가 흔들리는 내 마음을 붙잡아주었다. 자기는 미사를 드리는 게 어떤 건지 알아보고 싶다고. 척 궁금한데 엄마랑 같이 가보고 싶. 이렇게 아이 찬스를 등에 업고 용기를 냈다. 그리고 주일 미사와 예비자 교리교육까지 시작하게 되었다.





1월 내내 아이들이 번갈아가며 아프다가 결국 난치성 질환으로 큰아이의 투병이 시작되고, 남편의 회사가 재정적 어려움으로 휘청여서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작은아이마저 의심환자로 분류됐을 때.. 불행은 한꺼번에 찾아온다며 스스로를 고통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마냥 주저앉고 싶지는 않았다. 구렁텅이 속 작은 풀을 보면서라도 웃고 싶었다. 그동안 그래 왔던 것처럼 꿋꿋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우리 가족의 삶도 다른 이들처럼 계속 이어 나아갈 수 있게, 우리는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아들을 계기로 요리를 하고 운전을 하고 종교를 갖고 글을 쓰는 요즘은, 내가 아이들을 키우는 게 아니라 도리어 아이들이 모자란 애미를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은 날들의 연속이다. 아이들을 뒤편에 두고 내 삶을 찾으려 할 때는 그렇게 애들이 걸리적거리고 힘들었는데 아이들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다 보니 어제보다 나은 하루하루를 살게 되는 것 같다.. 참 신기하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큰아이의 투병이 불행이 아니라고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프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좋았겠지만, 아파서 특별히 더 불행해지지는 않았다고. 좋은 점도 꽤 있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자기가 아픈 덕분에 엄마가 운전을 하게 되었으니 자기를 엄마의 운전 스승이라고 불러달라는 큰아이의 뻔뻔함과 귀여움에 웃음을 터뜨리며, 오늘도 무탈했음에 감사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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