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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STAIN EATS Jul 23. 2022

밥상 앞에서 (1)

지속가능한 식문화의 지연된 정의(definition)

“공공책방은 ‘지속가능한 식문화’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궁금합니다.”




네이버 FARM판 공식포스트 ‘더농부’에서 인터뷰 전에 보내준 사전 질문지에 적힌 질문이다. 



이 질문은 지속가능한 식문화 매거진을 발행하는 우리에게 끝이 없는 수렁이다. 기획할 때마다 자문하고 질문한다. 두 에디터의 성향이 다른 덕분인지 지속가능한 식문화에 대한 공공책방만의 정의는 여러 색으로 뒤덮였다. 정의는 명확함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이다’라고 정하는 순간 ‘~아니다’에 속하는 영역이 생긴다. 정의내림을 지연시키는 것은 오랜 머뭇거림이자 의도적인 ‘선흐리기’이다. 





지속가능한 식문화는 지속가능성, 식(食), 문화, 이 세 가지에 방점을 둘 수 있다. 먼저 지속가능성은 생태적(환경친화적)에 해당한다. 파괴된 자연을 돌이키기 위해 또는 환경을 착취하며 생산하는 시스템을 돌이켜 변화를 이끌어낸 영역이다. 두 번째로는 식. 음식 자체에 중점을 두어서 전통 음식, 못난이 농산물, 음식물쓰레기, 식재료, 종 다양성, 요리법 등 실제로 먹거리 자체에 집중하는 흐름이다. 마지막으로는 문화이다. 문화는 비건(/채식), 전래식(/카니보어), 밀키트, 배달음식 등과 같이 사람들이 만든 흐름이다. 




정의는 이 세 가지 영역 위에 놓인 무게추의 기울기에 따라 과한 변화가 일어난다. 배달음식시장이 급격하게 성장함에 따라 배달기사의 교통사고나 노동문제가 끊임없이 일어나지만, 생태적 관점에서 배달업 자체가 탄소량을 과하게 증가시키기에 이용을 지양해야 한다고만 주장한다면 그 안에 있는 노동자들의 삶에 주목하기 어렵다. 그런가 하면 배달업의 증가로 비건의 음식 접근성은 더 윤택해졌다. 



한 가지 측면에서 문제를 바라볼 때 생기는 그늘을 줄이기 위해 우리는 지속가능한 식문화에 대한 경계를 최대한 흐릿하게 긋고 있다. 더불어서 이 세 영역이 겹쳐있는 공간뿐만 아니라 이 세 영역에 인접해 있지만 포함되지 않은 부분까지도 넓히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문장으로 ‘지속가능한 식문화’를 정의하기보다 이미지로서 지속가능한 실천하는 사람을 상상한다. 지속가능한 식문화를 추구하는 사람은 밥상 앞에서 어떤 모습일까? 탄소발자국을 계산하며 요리를 하는 사람일까, 토종 식재료만을 고집하는 사람일까? 비건을 고집하는 사람일까? 



나에게 지속가능한 식문화를 실천하는 사람은 밥상 앞에서 궁상떠는 사람이다. ‘시장이 반찬이다’라는 말처럼 궁한 사람은 어렵고 부족하기에, 한 끼의 식사도 그에게는 축제의 음식이다. 밥상을 마주한 그에겐 미소와 행복이 가득하다. 음식을 귀하게 먹을 뿐만 아니라 그 음식이 나에게 하루의 생명을 주었음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밥상에서 벌어지는 일은 이성보다 감성의 영역에 가깝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배부른 사람에게는 쓰고 아무리 맛없는 음식도 배고픈 사람에겐 달다. 원수와 마주한 식탁은 체할 것같이 목이 막히고 애인과 마주한 식탁은 아무리 먹어도 속이 편하다. 



요리하는 사람에게 이성의 시간은 식사시간이 아닌 요리, 식사, 설거지가 끝나고 다음 식사 전까지다. 무엇을 먹을까, 어떻게 먹을까 고민하다 보면 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이 떠다닌다. 그때가 지속가능한 식문화가 자라야 할 시간이다. 



밥상은 축제이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 기획, 준비, 반복, 데코가 필요하고 기다림과 번거로움을 감당해야 한다. 저녁 메뉴를 고민하고 냉장고에 있는 반찬거리와 남은 식재료를 확인한다. 식재료가 부족하면 시장에 가서 구입하고 집에서 다듬는다. 쌀을 씻고 불려서 밥솥의 취사버튼을 누른다. 국 한 그릇을 끓이면서 거듭 맛을 보면서 간을 맞춘다. 다 된 밥과 국은 자신만의 취향이 담긴 그릇에 담아서 식탁으로 옮긴다. 반찬은 그릇에 먹을 만큼 담는다. 나 같은 경우는 큰 접시에 반찬을 옹기종기 담는다. 설거지할 그릇을 덜기 위함이다. 틈틈이 설거지하면서 밥 먹은 후에 찾아올 노곤함에 미뤄질 일들을 줄인다. 



요리하는 사람은 이 과정의 반복을 경험한다. 오랜 반복은 과정의 소요시간을 줄일 수는 있어도 없앨 수는 없다. 내가 하지 않는다고 없어지지 않다. 누군가가 대신할 뿐이다. 밥상을 꾸리는 일은 필연적인 삶이다. 요리가 능숙하지 않으면 맛이 없을 수도 있고 운 좋게 맛있을 수도 있다. 내 요리는 맛이 없다. 하지만 맛있게 먹는다. 밥상 앞에서는 그런 시름은 필요없다. 내 앞에 놓인 받아들이는 마음이 중요하다. (계속)




본 글은 네이버 FARM판 '더농부'와의 인터뷰(2022.7.14.)에서 지속가능한 식문화에 대한 상념을 나눈 후 생각을 정리하며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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