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 『한나 아렌트의 정치 강의』
원글 작성일 : 9월 9일
증오하는 나를 인식하게 되면 증오의 정도에 제동을 걸 힘이 생긴다. 사건과 감정에서 한 발 물러서 타자의 관점에서 현상을 조망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타자의 관점을 이해하는 것, 이해하려 애쓰는 것은 건강한 정치의 씨앗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정치인은 거짓을 진실처럼 말하고, 언론은 과잉정보를 발생시켜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려 한다. 우리는 어떤 태도로 사건을 대면해야 할까. 어떻게 방관자가 아닌 참여자로서, 시민으로서 정치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을까.
그들이 우리의 눈과 귀, 입을 막아도 결코 건들 수 없는 것이 생각이다. 그들이 건들 수 없는 온전한 우리만의 것을 활용하여 정치의 행위자가 되어야 한다. 넘쳐나는 정보와 선전 속에서 그것은 점점 더 어려워 질 테지만,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한다면 정치와 언론에 잠식당하는 ‘개돼지’가 되는 것은 한 순간이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들은 자기를 이끌어주어야만 하는 것이 그들 자신의 판단뿐이고, 게다가 그 판단이 자기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의견과 완전히 어긋나는 것일 때조차도, 사람들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400쪽)
한나 아렌트에게 있어 정치적으로 자유롭다함은 사유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사유하지 않는 (정치적)행위는 언제든 악을 키워낼 수 있다. 나쁜 사람이 나쁜 의도를 가지고 나쁜 짓을 행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아돌프 아이히만의 일반적임(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람)은 크나큰 충격이자 혼돈이었다. 한나 아렌트는 이 모든 현상을 ‘이해하기’위해 노력했다. 전체주의가 지나간 후의 잔해 속에서 그녀는 악의 근원이 ‘무사유(사유할 능력 없음)’에서 기원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녀가 정의한 ‘악의 평범성’은 전체주의가 사라진 지금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의회에서 해야 할 일을 잊은 채 반대파를 척결할 궁리만을 하는 정치인은 언제든 아이히만이 될 가능성이 있다. 검증을 건너뛴 채 의혹 가득한 뉴스만을 뱉어내는 기자 역시 펜으로 사람을 죽이는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혹시 이슈는 재밌는 안주거리일 뿐이고, 빨리 결론이나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과잉정보에 지쳐 정치에 신물을 느끼진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도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누구나 아이히만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유가 중요한 것이다. 국민의 눈을 가리는 언론 검열도, 사상을 주입하는 ‘땡전뉴스’도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한들 사유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어떻게 정치적 사건을 바라봐야 할까. 어떻게 판단하고 사유하는 힘을 기를 수 있을까. 사유는 판단력을 기초로 하고, 판단력은 관찰에서 비롯한다. 어제의 진보가 내일의 보수가 될 수 있는 것이 정치판인지라, 수많은 사건을 포괄할 수 있는 보편적인 기준과 규칙을 세우기 어렵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에게 좋은 정치 감각이 내재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감각은 계속해서 자극시키고 정보를 주입시키며 발전시켜야 하는 과제일 뿐이다.
좋은 정치 감각을 키워나가기 위해 1차적으로 필요한 것은 ‘관찰자의 사고방식’이다. 사건에서 한 발 떨어져 관조함으로써 객관적 시각을 길러야 한다. 관조함에서 올바른 판단이 생성될 수 있다.
과잉정보가 우리를 지치게 하더라도 한 발 떨어져 바라본다면 조국 사태는 세 가지로 압축된다. 자녀 입시 문제, 사모펀드, 웅동학원. 그 다음 후보자 측에서 해명한 자료를 파악하면 모든 궁금증은 쉽게 해결된다. 더 이상 뉴스가 우리에게 진실을 알려줄 것이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만들어낸 진실’을 ‘참 진실’인 듯 제시할 뿐이다.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말고 오직 관찰과 판단으로 혼돈에서 우리의 권리를 지켜내야 한다.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라. 또한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하라. 이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 석가의 마지막 유훈 中
올바른 사유가 빚어낸 판단이 소통을 통해 확산될 때 우리의 정치적 행위는 온전해지고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우리는 관찰자이자 행위자가 되어야 한다. 한나 아렌트는 획일화되지 않은 인간만이 자유롭고, 다원성이 민주정치의 근본이라 말한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누구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공론 영역이 활성화 된, 아테네의 아고라와 같은 구조이다.
대의민주주의를 살고 있는 시대에, 우리에게 아테네의 아고라는 없지만 절망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손바닥 안에 아고라를 만들 수 있는 SNS가 있지 않은가. 우리가 정치적으로 자유롭기 위해 행하는 모든 행위는 결과적으로 가짜뉴스에 대항하는 힘(여론)이 되고, 거짓을 말하는 정치인을 단죄할 칼이 된다. 다양한 사유가 모여 참된 길을 찾아나가는 것이 가장 자유롭고 이상적인 정치이다.
다행인 것은 이미 우리는 그러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조국 사태로 가짜뉴스의 위험성을 체감한 일반 시민 중 한 명이 ‘리포트래시(www.reportrash.com)’라는 웹사이트를 제작해 운영하고 있다. 이 사이트에 가짜뉴스 URL을 올리면 그 데이터가 축적되어 어떤 미디어에서 가짜뉴스를 만들어내고, 어떤 기자가 자질이 없는 지 파악할 수 있다. 언론사의 팩트체크만큼 정확한 분석은 어렵지만, 언론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더불어 한상혁 신임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은 가짜뉴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겠다며 국민의 우려를 반영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국민의 신뢰를 잃은 언론은 정체성을 잃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깨어있다는 것을 계속 드러내어 그들에게 경각심을 주어야 한다. 이렇게 우리는 관찰자임과 동시에 참여자로서 정치적 자유를 누리고 있다. 직접 법안을 발의하고 취재를 나서기는 어렵지만, 이미 우리는 한 단계 진보했다.
영화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의 보가트,「그것」의 페니와이즈가 떠오른다. 보가트와 페니와이즈는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형태로 우리에게 나타나 우리를 위협하는 존재이다. 그것들의 실체는 ‘두려움’ 그 자체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두려움을 먹고 더 강해진다. 우리는 정치 문제에 있어서 민주주의의 퇴보나 독재의 부활, 비리가 승리하는 현실이 도래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사실 그것보다 앞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사유하지 않는 나 자신’이다. 진짜 정치 괴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의 무관심과 무사유이다. 무관심과 무사유는 우리로 하여금 정치를 어렵거나 더러운 것으로 인식하게끔 만든다. 그 순간 정치는 보가트와 페니와이즈처럼 두려움 그 자체가 되어 우리를 위협할 것이다. 우리 안의 아이히만을 억누르고, 그들이 아이히만이 되지 않도록 제동을 거는 것은 오직 ‘사유하는 힘’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