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유는 순도에 따라 4개 등급으로 나뉜다. 최상위 등급인 엑스트라 버진은 맛과 향이 뛰어나며, 건강에도 좋아 많은 사람들이 샐러드 드레싱으로 이용한다. 반면, 최하위 등급인 포마세는 주로 비누, 화장품을 만드는 공업용으로 사용된다. 만일, 바로 섭취한다면, 인체에 매우 해로울 것이다.
본분(duty)
2021년 8월 25일 새벽. 아프가니스탄 카불 항공을 이륙한 C-130J 한국군 수송기 안에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한국 대사관을 도왔던 현지 협력자들과 그 가족들이 탈레반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함께 일했던 아프간 동료들을 구출하기 위해 공관 직원들과 군인들을 급파하였다.
작전명 ‘미라클’. 이 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공직자,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실제 이들은 아프간 현지의 위험한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가족들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아프가니스탄으로 조용히 떠났다. 어떤 공직자는 작전 수행 중에 모친상을 당하기까지 하였는데, 그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결국 본분을 잃지 않았던 이들의 노고 덕분에 미라클 작전은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본분 (本分). ‘마땅히 지켜야 할 책임’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이 단어는 의무(duty)와는 다른, 더 본질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직업의 소명’ 관점의 의미가 밑바탕에 깔려 있어서 나의 책임과 의무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해 준다.
OOO으로서 본분을 다해야 한다. (대통령, 경찰관, 버스기사, 의사, 주방장, 패션 디자이너 등등)
본분이 중요한 이유는 앞서 미라클 작전에서 보았듯이 본분을 다하려는 마음이 수반될 때, 아름다운 일의 결과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본분을 다하려는 마음들이 서로 맞물려 돌아갈 때,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소중한 진리를 재발견하게 된다.만일, 본분에 대한 의식이 미약하다면, 단순 생계수단으로만 생각하고 옳지 않은 일에 이끌려 다니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되어 우리 사회는 불의한 사회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각자 맡고 있는 직업의 본분이 무엇인지 재정의하고, 그 순도를 최상위 올리브유 등급인 엑스트라 버진 수준으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소위 ‘4차 산업혁명 시대, 고도화된 자본주의 시대’에서 우리는 우리의 ‘본분’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위선
기업, 정부 기관, 종교 단체 등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조직의 사명(mission statement)이 잘 정의되어 있다. 대부분 사명은 각 조직이 추구하는 비즈니스 본질에 기초하여 만들어지는데, 사회와 고객에게 어떤 가치를 제공하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자 약속이다. 따라서 이 약속을 올곧게 지키는 것이 조직 구성원들의 본분일 것이다.
그런데, 만일, 각 조직이 공약한 사명과 만들어내는 서비스 결과물이 다르다면 어떻게 될까? 사회와 고객은 그 조직을 외면하거나 서비스에 대해 클레임을 제기할 것이다. 왜냐면, 말(사명)과 행동(서비스)이 달랐기 때문에. 우린 이것을 위선이라고 부른다.
이런 상황에서 더 큰 문제는 조직 내부에 있다. 조직 구성원들이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위선임을 인지하고 못하고 오히려 스스로를 정의롭게 여기고 스스로를 합리화시킨다면, 조직 전체를 위협에 빠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구성원들은 위선임을, 사명의 순도가 점점 떨어지고 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들의 역사는 ‘위선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굽은 길을, 정상 궤도(on track)로 옮기려는 ‘의로운 자’들의 외롭고 힘든 싸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역사 속의 대표적인 사례로 종교개혁을 말할 수 있다. 다음 장에서 종교개혁에 대해 함께 깊이 사유하면서 왜 개혁의 거센 요구가 있게 되었는지, 효율적인 개혁을 위한 tip을 얻고자 한다.
종교개혁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면죄부 판매’, 이는 기독교 사명의 순도가 올리브유 최하위 수준인 포마세 등급으로 전락하였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16세기 초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신축 자금 확보를 위해 면죄부 판매를 단행하였다. 로마 교황청은 면죄부를 천국 가는 통행증이라 오도하며, 돈을 받고 증서를 판매하였다. 이 행위에 공식적으로 클레임을 제기한 사람이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루터였다. 1517년 루터는 부패한 가톨릭의 문제점들을 ‘95개조 반박문’으로 정리하여 공포하였다. 이 사건은 오늘날 개신교 탄생의 계기가 되었다.
기독교는 AD 30년경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무렵의 교회를 초대교회라고 부른다. 초대 교회는 다락방 등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예수님의 숭고한 정신과 가르침을 받들고 지켜 나아갔다. 이 초기 성도들의 순수한 신앙은 로마제국의 핍박과 박해 속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AD 329년)하기에 이르른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 아마도 이때까지는 기독교 사명의 순도가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신정일치 사회의 막강한 권력을 잡은 기독교는 1,000년이라는 오랜 시간에 걸쳐 그 순도는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사명의 순도 변화
첫 번째 갖는 의문은 왜 사명의 순도가 떨어지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을까? 불의한 관성이 자라는 것을 왜 느낄 수 없었던 것일까?이에 대한 답의 힌트를 십자군 전쟁에서 얻을 수 있었다. 11세기 말 교황 우르반 2세는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자’라는 대의명분으로 십자군 전쟁을 결정한다. 하지만, 성전(holy war)을 제안한 교황마저도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이기적인 욕망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전쟁에 참여한 영주, 기사, 상인, 농민 등 그들 역시도 영토 확장, 경제적 이득 등 탐욕에 사로잡혀 있었다. 겉으론 군복에 십자가 표식까지 넣어가며 성전이라고 외쳤지만, 더러운 이기적 탐심으로 뭉쳐 최악의 살육 전쟁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서 충격스러운 사실은 이런 사명의 순도가 떨어지는 순간 불의함을 감지하기는커녕, 이것을 바라보는 다수의 사람들은 오히려 기뻐하고 지지하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자본주의 발전 속에서 사회 양극화,지구온난화 문제 등 심각한 국면으로 치닫고 있지만, 오로지 성장만을 갈망하며 그 기쁨에 도취되어 있는 우리들의 모습과 비슷하다. 결국, 인간의 이기적 탐심은 스스로를 정의롭게,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며 더 깊은 수렁으로 빠트리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갖는 의문은 순도를 회복하는데 3백 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이다. 신학자들은 종교개혁의 시작점을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공포되기 150년 전 14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끝은 100여 년의 종교전쟁을 거쳐 17세기 말 끝났다. 문제점을 발견하고 개선하는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일까?
여기서 생각해 볼 부분은 ‘인정’이다. 인간은 자기 잘못을 쉽게 시인하지 않는다. 어렸을 땐 부모님에게 야단맞고 “잘못했어요.”라고 말하는 교육을 받았지만, 정작 어른이 되어서는 “죄송합니다.”, “제 잘못입니다.”라는 말을 자발적으로 하지 않는다. 결국, 잘한 일만 남고, 잘못한 일은 감추는 불의한 사회를 우리들이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교황과 사도들은 초기에 순도 높았던 그 마음, 그 정신에 문제를 비추어 인정하지 못했을까?그것은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이미 무시무시한 마성으로 질된 탐심이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마성은 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극한의 저항으로 버틴다. 그래서 300년이란 긴 시간이 걸린 것이 아니었을까?
결국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개인과 조직, 사회는 자기 정화의 기회를 잃게 된다. 개혁의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를 정화하는 것인데 말이다. 앞으로 이런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면, 내 자신을 초심(first mind)에 비추어 쿨하게 인정하고 협의하는 자세를 취했으면 좋겠다. 우리 공동체와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서.이런 맥락에서 보았을 때, 우리 인간들이 좀 더 정직하였더라면, 개신교의 탄생은 없었을지 모른다. 14세기 말 초기 종교개혁가인 존 위클리프 교수, 얀 후스 신부와 같은 분들의 말을 일찍이 겸손히 받아들이고 시인하였다면 말이다.
오늘날 우리의 본분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히포크라테스 선서*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히포크라테스가 의료인으로서의 윤리를 명시한 지침서)
최근 병원 수술실에 CCTV를 설치하는 법안이 의료인들의 반대로 오랫동안 계류되었다가 통과되었다. 난 이 문제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 의대 졸업할 때 선서한 히포크라테스 정신을 잃어가는, 의사로서의 사명을 잃어가고 있기에 사회로부터 CCTV라는 요구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고 권대희 군은 안면 윤곽수술을 받다가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 1심 재판부는 "다량 출혈에도 공장식 수술 라인을 돌리느라 치료행위 없이 골든타임을 놓쳤다"라고 공식적으로 적시하였다. 공장식 수술…. 인간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한다라는 히포크라테스의 정신은 인간의 탐심에 눈이 멀어 공장식으로 운영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또 어느 척추 전문 병원에서는 의사 면허가 없는 행정직 직원들의 손에 절개와 봉합 등 의료 행위를 맡겨 구속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정의의 여신
우리나라 대법원 로고를 보면, 정의의 여신 ‘디케’를 모티브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정의의 여신은 한 손에 저울을, 다른 한 손에는 칼을 쥐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여기서 저울은 공정함을, 칼은 정의를 훼손한 자에 대한 심판을 상징한다. 그런데 오늘날 정의의 여신에 한 가지 추가된 모습이 있다. 그것은 디케의 두 눈을 안대로 가리고 있는 것이다. 청탁, 로비, 부정한 관계 등 불공정한 현실 속에 정의의 여신에게 안대가 필수 소품이 되었다는 것이 씁쓸하다. 하지만, 그 칼이 선량한 시민들에게 자칫 잘못 휘둘러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안대 정도가 대수일까.
사실, 위 언급한 고 권대희 군 의료 사건을 담당한 OOO 검사는 무면허 의료행위가 담긴 CCTV 증거가 존재하였고 행정기관의 유권 해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소조차 하지 않았다. 권대희 군의 어머니는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제대로 판결 받기 위해 법원에 재정 신청하였으며, 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검찰에 공소 제기할 것을 역으로 명령하여 비로소 재판할 수 있게 되었다. 1심 판결 결과 실형이 선고되어 의사는 구속된 상태다. 이런 위중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어떻게 기소조차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들의 저울은 선량한 힘없는 시민을 위해 제대로 작동된 것일까?
오늘날 본분을 망각하거나 소홀히 하는 일은 비단 의료계나 사업부에서만 나타나는 문제는 아니다. 우리의 일터 현장에서는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있으며, 비즈니스에는 불의한 로비가 판을 치고 있다. 각자 맡고 있는 직업(회사원, 공무원, 교수, 목사, 국회의원 등)의 본분을 망각한 채, 오로지 경제 논리와 그 ‘돈’을 확보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는 듯하다.
이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세울 수 있는 빠른 길은 자기 정화이다. 자기 정화를 위해서는 스스로의 본분이 무엇인지 정의를 다시 내리고, 그 본분에 비추어 올바른 일이 아니면 고개를 돌리는 것이 필요하다. 나를 위한 이기적인 삶에서 우리를 위한 이타적인 삶으로 삶의 방향을 틀어야 한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올리브유 포마세 등급은 공업용으로 쓰인다. 우리 개인과 조직, 그 본분의 순도는 어느 레벨에 속할까?
Re-creation본분
성선설 vs 성악설 중, 난 성선설을 믿는다. 3~4살 어린아이들의 순수한 모습을 떠올리면, 악이란 모습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학을 갓 졸업한 신입직원들도 회사에 들어오면 풋풋하고 순수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풋풋함이 오래가지 못한다라는 것이다. 회사의 잘못된 관성에 빠르게 익숙해지고 스펀지처럼 푹 젖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하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아마도 건설업자로부터 돈 받는 공무원도, 불기소 처분을 내리는 검사도, 자사의 상품을 과대광고하는 마케터도 그릇된 관성, 옳지 않은 문화를 몸에 익힌 결과일 것이다.따라서 불의한 관성의 사이클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제 Re-creation 해야 한다. Re-creation의 첫 번째는 조직과 개인의 사명, 본분이다!
IT서비스 기획 일을 메인으로 하는 나는 얼마 전, 몇 가지 원칙을 스스로 세워보았다.
- 바르지 못한 일은 옳지 않다고 당당하게 말하겠습니다. 그리고 잘못은 주저하지 않고 인정하겠습니다. - 오류 발생 시 숨기지 않고 사용자에게 바로 알리겠습니다. – 하루 시간의 20%는 동료를 돕는 일에 쓰겠습니다.
조직과 개인이 맡은 본분을 다하려고 노력할 때, 그 마음은 밤하늘의 별들처럼 반짝반짝 빛 날 것이다. 그 별들은 서로 연결되어 더 아름다운 밤하늘을 수놓게 될 것이다. 각자 자리에서 공의(righteousness)를 정직하게 수행하는 창조자(craftsman)들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