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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예 Aug 08. 2023

이어폰을 끼고 말해야 안 떨리나 봅니다

호주 카페에 이력서 내러 갔다 눈까리 된 사연

멜버른에 온지 3개월 차, 드디어 처음으로 카페에 이력서를 내러 갔다. 여기선 보통 레쥬메 드랍(드롭)이라 말하는데 채용 사이트를 통해 이력서를 보내면 99% 확률로 답을 못 받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많은 워홀러들은 직접 카페, 레스토랑에 방문해서 본인의 레쥬메(또는 CV)를 제출한다. 


직접 방문해서 레쥬메 내시면 돼요.


라는 그 한 줄에 얼마나 많은 말들이 숨어있는가. 일단 영어로 매력적인 레쥬메를 만들어야 하고 어떤 카페, 레스토랑이 채용을 하는지 확인해야 하고, 어디에 언제 갈지를 정해야 하고, 또 가서는 어떻게 영어로 말을 해야 나의 이력서를 봐줄지를 고민해야 한다. 


일보다 영어가 일순위였던 늦깍이 워홀러는 어학원을 졸업하고 드디어 일을 구하기 시작했다. 멜버른 바리스타가 되고 싶은 난, 친구의 추천으로 알게 된 카페는 아니지만 커피 머신이 있는 레스토랑에 가게 되었다. 우선 채용 사이트에서 이력서를 제출했고 (그러나 연락은 없었고) 메일 주소를 통해 이력서를 보냈고 (그러나 연락은 없었고) 친구가 매니저에게 다른 친구가 관심 있어한다는 말을 전한 날, 드디어 직접 이력서를 내러 가기로 했다. 


떨렸다. 한국에선 6년차 직장인이었고 나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는 프로덕트 오너였음에도 난생 처음으로 외국에서, 또 영어로, 그리고 직접 "Hi~ 나를 뽑아주세요! 나 여기 있어요!"라고 말해야 하는 퍼포먼스를 하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두근거렸다. 


설마 이어폰을..?


아직도 진실은 알지 못한다. 한가한 오후 시간에 가기로 하고 이력서를 뽑아 파일에 곱게 넣어 그곳으로 향했다. 긴장을 풀기 위해 에어팟을 꼽고 노래를 들었다. 한국어 노래를 들으면 영어가 잘 안 튀어나올까 싶어 팝송을 들으며 걸어갔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처음이잖아. 편하게 하자고.' 라고 멘탈을 관리하며 입꼬리를 살짝 올려 고객 서비스에 어울리는 이미지로 꾸몄다. 


심지어 레이디가가의 Poker face를 들으며. 평소엔 차분하지만 일할 땐 더 밝고 외향적이다라는 이미지로 포커페이스 하자라는 의미로 말이다... 깔끔한 옷차림과 단정히 묶은 머리, 최상의 컨디션이다 생각하며 향했다. 


거의 다 왔을 무렵, 가방에서 레쥬메 파일을 꺼내고 머리를 잘 만져보고 노래도 끄고 다시 한번 입꼬리를 올리고 눈은 반짝인(척하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시나리오대로 "Hiring Sign 보고 왔어. 내 친구가 여기서 일하기로 해서 알게 됐어." 어쩌구 저쩌구라고 대답하는데 듬성 듬성 단어가 잘 안 들렸다. 착하다던 친구의 말과 달리 그 매니저는 매우 시니컬해 보였다. '아 여기 지금 오픈 준비로 바빠서 그런가보다.'하고 어찌저찌 이틀 뒤 정식 인터뷰 날짜를 받고 신나는 마음으로 나왔다. 


얼굴이 붉어져있고 조금 당황해서 했던 말을 또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첫 도전에 첫 트라이얼 날짜를 받아온 건 잘했어!라며 내 자신을 북돋아 주었다. "나 트라이얼 하기로 했어!"라고 친구에게 문자도 보낸 후 떨렸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니 노래 듣자하고 에어팟 케이스를 꺼냈는데..!


이어폰이 귀에 꽂혀있었다.  


설마... 기억이 안 난다. 분명 입구에 들어서기 전, 단장하고 음악도 끄고 분명 이어폰을 에어팟 케이스에 넣었다 생각했다. 근데 그 장면은 기억이 안 난다. 내가 정말 넣었는지 안 넣었는지. '헉, 뭐지. 나 정말 귀에 꽂은 채로 들어갔나?' 심지어 반묶음을 하고 갔기에 귀에 꽂혀 있었다면 잘 보였을 수 밖에 없었다. 


술을 진탕 마시면 잠시 기억의 일부가 사라지는 것처럼 그 부분은 제대로 기억이 안 난다. 아직도 말이다. "이어폰을 끼고 일해야 능률이 올라갑니다."의 눈까리처럼 나는 "이어폰을 끼고 말해야 안 떨립니다."와 같이 매니저에게 직접 레쥬메 드롭을 하는 그 날, 어찌보면 예의없어 보이게 이어폰을 끼고 말했던 것이다.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 그랬나? 그래서 시니컬 했던 걸까? 어찌됐든 이틀 뒤 짧은 인터뷰와 커피 한 잔을 만들어보는 테스트를 했고. 번호는 받아갔으나 지금까지 연락이 없는 걸 보면 떨어진 게 분명하다. 


난생 첫 트라이얼, terrible 커피를 만들었다..



아직도 떨리니?


처음은 늘 떨린다. 회사를 다녔든 일을 많이 했든 간에 첫 도전, 첫 시작. 모든 처음은 여전히 떨린다. 처음이자 마지막 워킹홀리데이를 하는 지금, 수많은 처음과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했던 트라이얼에서 합격해 멜버른 바리스타가 되었다


이제 내겐 첫 멜버른 바리스타 도전기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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