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한다는 말이 과거형이 되지 않도록
'아주 오래전 내가 올려다본 그의 어깨는 까마득한 산처럼 높았다...'
신해철의 <아버지와 나>라는 노래 가사처럼 아버지는 내게 언제나 그런 분이었다.
10여 년 전, 회사에서 자기 계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 강사가,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진심으로 말한 적이 있냐고 물었다. 가족 간에도 표현하지 않으면 모른다며 꼭 표현해보라는 얘기를 했었다. 자기 계발 강의라는 게 으레 그렇듯이, 들을 때는 많이 공감하면서도 돌아서면 잘 실천하지 않는 법인데, 그때는 웬일인지 꼭 해보고자 마음먹었다. 부모님이라는 말엔 늘 마음 한구석을 따라다니는 죄송함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강의를 듣고 얼마 되지 않아, 마침 혼자서 대구 고향집에 내려갈 일이 있었다. 아직도 엄마는 엄마라고 부르면서, 중학교 이후부터는 아버지는 아버지라고만 불렀기 때문일까, 아버지에겐 사랑과 존경, 어려움의 복합적인 감정이 함께 있었다. 집에 오자마자 아버지께 뜬금없이 '사랑합니다'라고 얘기하면 이상하게 생각하실 것 같아서 망설였다. 어쩔까 하다가, 할아버지 산소를 자주 찾으시는 아버지께서 다음날 할아버지 산소에 가자고 하셨기에,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그때 둘이 차에 있을 때 얘기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 1시간 반이나 되는 운전길에도 기회를 잡지가 쉽지 않았다. 남자 간의 대화란 게 그렇듯이, 짧은 대화 몇 마디 이후엔, 부담스러운 적막을 이겨내려는 듯 아버지가 라디오의 볼륨을 올리셨다. 둘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산소를 정리하면서도 이제나 저제나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망설이기만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게 됐다. 돌아오는 길은 피곤하셨는지, 이내 잠이 드셨고, 나는 속으로 어찌할 줄을 몰라 계속 애만 태웠다. 시내로 들어오셔서는 잠이 깨셨지만, 라디오가 우리 사이를 계속 가로막고 있었다.
차가 앞산네거리를 지나 우회전할 때, 이제 더는 늦추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버지가 높여놓은 라디오 볼륨을 줄이면서, '아버지' 이 한마디를 꺼내는데,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감적이 북받친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말을 이어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그리곤 내가 아버지를 얼마나 존경하는지, 나중에 내 아이들이 자랐을 때, 내가 아버지를 생각하는 것처럼 아이들이 나를 생각해 준다면 나는 정말 성공한 삶을 산 것이리라 믿는다는 얘기와 왜 갑자기 사랑한다는 말을 하게 됐는지를 아버지께 눈물 섞인 목소리로 설명드렸다. 아버지께서는 '안다, 말 안 해도 다 안다. 가족 간에는 그런 얘기 안 해도 다 안다'며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면서 잘 자라준 자식들에게 아버지가 얼마나 감사해하는지를 얘기하시는데, 나 또한 눈물이 계속 흘렀다.
한 여름의 폭풍 같은 눈물 고백이 이어진 후, 집에 이를 때쯤 아버지와 아들은 다시 예전의 그 말없는 부자지간으로 돌아갔고 집에서 맞이한 어머니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 지도 모르셨지만, 둘 간에는 예전보다 더 크고 단단한 그러면서도 따뜻한 무엇인가가 놓여있는 것 같았다.
지금도 내가 살면서 잘했던 몇 가지 일을 떠올릴 때면 꼭 생각나는 게 이때의 경험이다. 가족조차도 언제 어디서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이별할 수도 있는 데,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가슴에 담아두기만 하고 못다 한 말이 있다면 얼마나 평생 한이 될까? 그리 쉽지는 않지만, 꼭 한 번 용기를 낼만큼 가치 있는 일. 오늘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진지하게 말해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