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시간과 긴 미안함
추석연휴에 시골에계시는 93세 어머니를 모시고와 며칠 함께했다.
외식도, 쇼핑도 이제는 어렵다.
식사는 모든 재료를 잘게 다져 아주 작은 접시에 담아 한 수저씩 올려드린다.
그마저도 힘겹게 삼키시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아프다
모시지도 못하고, 더 잘하지도 못해 속상하다
돌봄을 어떻게 이해하고 선택할 것인지부터 다시 생각했다.
정치윤리학자 조안 트론토는 돌봄(care)을 사적 선행이 아니라,
인간의 상호의존성을 인정하는 관계의 윤리로 본다.
이 관점에 서면,
늙어 부모와 자식의 역할이 뒤바뀌는 순간은
실패가 아니라 성숙의 장면이 된다.
의사이자 인류학자인 아서 클라인만은
자신의 간병 경험을 통해
돌봄을 ‘기술’이 아니라
도덕적·관계적 학습이라 부른다.
잘해내는가보다 함께 배우며 버티는가가 핵심이라는 뜻이다.
임상적 선택에도 근거가 있다.
고령자의 연하(삼킴) 곤란이 있을 땐
질감 조절·소량 분할·손 급여(hand feeding)가 권고되고,
고도 치매 환자에서 위장관 튜브 급식은 권하지 않는다는
노인의학계 입장이 확립돼 있다(사망·흡인성 폐렴·기능·편안함에서 손 급여와 동등하거나 우월, 튜브 관련 합병증·억제 사용 위험은 더 큼).
또한 Comfort Feeding Only(편안함을 위한 개별 급여)라는 제안은,
인공영양/수분 중단 여부의 이분법을 벗어나
‘편안함 최우선’이라는 목표를 명시한 손 급여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WHO 역시 완화의료의 목표를 환자와 가족의 삶의 질로 두고,
가정·지역사회 기반의 돌봄과 가족지지를 강조한다.
마음의 파도에는 이름이 있다.
심리학은 지금의 이 감정을 예기 애도(anticipatory grief)라 부른다.
임박한 상실을 예상하며 겪는 슬픔과 불안은 오르내리며
때로 준비와 작별을 돕고,
때로는 지지망이 필요하다.
이별을 ‘완전한 단절’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동행으로 재구성하는 지속적 유대(continuing bonds) 관점도 유효하다—사진, 의례, 내적 대화로 관계를 이어가는 일.
나는 오늘도 흔들린다.
죄송함과 고마움,
지침과 감사 사이에서.
하지만 배운다.
완벽 대신 충분함을,
크기 대신 깊이를.
사랑은 늘 부족해 보이지만,
함께 머문 시간만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더 모시지 못한 미안함이 사랑의 크기를 줄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어쩌면 죄책감은 내가 더 잘하고 싶었다는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끝없이 완벽을 요구하는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할 수 있는 만큼의 사랑’도 사랑임을 배운다.
돌봄은 성취가 아니라 존재다.
내가 완벽하지 않아도, 곁에 머문 시간은 기록처럼 남는다.
신앙의 언어로는 이렇게도 정리할 수 있다.
“부모를 공경하라”—의무가 아니라 관계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약속이다.
믿음 유무와 무관하게,
오늘 우리가 확인할 결론은 같다.
존엄을 보존하고,
시간을 함께 견디며,
작게라도 꾸준히 연결하는 것.
이별의 날짜는 알 수 없지만,
오늘 엄마에게 건넨
잘게 다져만든 죽 한 수저는
분명한 사랑의 증거로 남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