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로 처음 브런치에 글을 써본다. 그만큼 브런치를 편히 여기는 메모장처럼 다루게 되었다. 오늘의 메모의 주제는 고양이의, 나루의 온기가 아주아주아주 나를 안정시켜준다는 것.
나는 대화의 장, 이라는 곳에서 작업실을 빌려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쓴다곤 하지만 대부분 멍을 때리고, 영감을 간신히 붙잡고, 고양이를 쓰다듬는 시간이다. 그 틈에 간간히 글을 쓰고 있다. 기한이 정확히 정해진 행복이 때론 아쉽고 불안하지만, 오늘 일로 그 이후의 공허함을 미리 대비할 수 있었다.
공허함을 대비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오늘 이 메모를 킨 이유다. 사적인 이야기를 아주 공적으로 만들고 싶었다. 대화의 장에는 세 마리의 고양이가 산다. 나루, 깨깨, 루루.
나루는 10살이다. 10년의 세월만큼 나보다 10배는 아량이 넓다. 사랑을 먼저 주고 먼저 다가오고 먼저 꼬리를 바짝 세워 아는 채를 하는 존재가 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는가. 그는 그의 마음처럼 비단결같은 털을 가지고 내 온 몸에 자신을 던진다. 그렇다. 던진다. 그는 머리로 내 가슴과 배와 종아리를 밀며 돌린다. 간혹 내가 참지 못하고 그를 온 상체와 팔로 돌려 안은채 오래 있으면 엥! 하며 말한다. 인간의 언어로는 '이제 그만~'이라는 표현이다. 혹은 '알았어, 나도 좋아. 근데 조금 답답해.'라는 신호이다. 이 복잡한 마음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그는 꼭 적당함과 정확함의 천재같다. 마지못해 풀어주는 나에게 다시 얼굴을 부빈다. 인간인 나의 얼굴에 고양이가 수염과 귀와 옆 얼굴을 맞댄다. 이만큼 나와 그의 사이가 종으로도 구별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지는 충만한 순간은 없을 것이다. 꼭 메모해두어야 한다고 황급히 느끼기까지 안일히 만끽했다.
오늘은 내가 대화의 장에 도착했는데도 나루가 바로 오지 않았다. 그를 고양이 방에서 우리의 공동 작업실로 데려오는 것은 온전히 직원에게 달려있었다. 나는 나루의 이름을 높여 부르는 대신 직원 분에게 나루의 안부를 물었다. 나루는요? 나루는요? 마치 다른 이들이 나의 연인의 안부를 그에게 직접 묻지 않고 나에게 끊임없이 묻는 것 같았다.
직원 분들도 나처럼 당혹스러워했다.
"글쎄요. 글쎄요. 자고 있겠죠? 아닌가 밥 먹고 있으려나."
나도 나의 연인의 안부를 물어보는 이들에게 말한다.
"지금 당장이요? 음, 글쎄요. 일하고 있겠죠? 밥 먹었을걸요, 아닌가. 아직 안 먹었으려나."
의자와 허벅지가 참 쓸쓸했다. 나루가 없는 텅 빈 허벅지 위에 책을 올려두었다. 보스토크의 <타인의 고통>이었다. 내 고통에 벅차서 책이 멀고 어려웠다. 나루가 허벅지 위에 없다는 고통이었다. 나루가 위에서 몸을 말고 있다가 다리를 뻗었다가 기지개를 켰다가 엥!하고 가끔 울었다가 올려다보았다가 하는 동안 안경을 끼고 책을 읽고 글을 썼던 지난 시간들. 한 달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잠깐, 주마등은 죽을 때나 스치는 것이 아니었나. 나는 나루가 없다는 그 잠깐의 상실이 마치 죽음처럼 느껴졌다. 오버하면서 온갖 감정을 확대하고 실망하고 있을 때, 나루가 왔다.
나루가 허벅지 위에 눕는 순간, 모오오든 졸음이 몰려왔다. 명상도, asmr도, 책도 재우지 못했던 나의 새벽을 데려와 나루가 허벅지에 같이 누웠다. 마스크를 쓰고 입을 벌리고 잤다.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어 온전한 휴식으로 다이빙했다. 이 순간들의 총합으로,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칼국수 집 사모님에게서 받는 스트레스의 날과 월세가 밀려 오는 독촉 전화에 대한 불안의 날과 3월부터 나루 없이 지낼 날들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공허를 약간이나마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