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교회란 참 재미있는 곳이다.
우리 동네에는 교회가 없었다. 교회는 소재지에 있었다. 집에서 소재지까지는 어린이 걸음으로 족히 한 시간은 걸렸다. 우리 동네에서는 온 가족이 교회에 다니는 집은 없었다. 우리 동네는 최씨 집성촌이었다.
읍교회의 선생님들이 우리 동네에서 와서 아이들에게 과자를 준 후 교회에 다니는 애들이 생겼다. 우리 집에서는 나만 다녔다. 아부지가 남동생은 나중에 제사 지내야 한다고 못 다니게 했다. 어린 시절 가시내여서 좋았던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교회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교회에 오면 맛있는 것을 준다고 했다. 일요일에 교회차가 마을로 와서 우리를 교회에 데려가고, 교회가 끝나면 다시 마을로 데려다준다고 했다. 교회 선생님들은 간식으로 우리를 꼬셨지만 우리는 교회차, 봉고차를 태워준다는 말에 혹해서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 동네 아이들은 리어카나 경운기만 타봤지 차는 거의 타보지 못했었다. 차가 귀한 시절이라 교회차를 탄다는 것 자체가 특별하고 흥분된 경험이었다. 한 시간을 걸어야 하는 길을 차를 타면 10분 이내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교회차 창문 쪽 자리가 가장 인기 있었다. 교회차 안에서 밖에 걸어가는 애들을 보면 누군가 "땡땡이 걸어간다"라고 말했다. 그럼 그쪽 창가에 앉은 애들이 땡땡이에게 손을 흔들고 혓바닥을 내밀고 메롱메롱거렸다. 애들의 메롱은'너가 한시간 걸어 가야하는 길을 우리는 5분이면 간다. 약오르지'를 의미했다.
교회선생님은 일요일 아침에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애들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 마을 담당 선생님은 키가 멀대처럼 크고 안경을 쓴 경상도 말투의 40대 남자 선생님이었다. 애들은 그 선생님을 키다리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맨날 양복을 입고 집 앞에서 "땡땡아, 교회 가자."라고 아이들을 불렀다. 애들은 처음에는 교회에 가고 싶어서 토방에 앉아 선생님을 기다렸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교회의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선생님이 교회 가자고 부르면 애들은 대답하지 않고 방 안에서 집에 없는 척 조용히 있었다. 아이들의 대답이 없어 몇 번 허탕 친 선생님은 어느 날부터인가 토방 앞에서 "땡땡아, 교회 가자."라고 말하며 방문을 활짝 열기 시작했다. 그 당시 대문이 있는 집이 없었기에 교회 선생님은 마음대로 집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선생님이 마음대로 방문을 열고부터는 아이들이 교회 가기 싫어서 마을 뒷산으로 도망 다녔다. 그럼 키다리 선생님이 긴 다리로 쫓아와서 특유의 경상도 억양으로 "땡땡아, 교회 가자."라고 말했다. 달리기 잘하는 애들은 멀찍하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달리기를 못하는 착한 애들은 선생님 손에 잡혀 교회에 끌려갔다. 나중에는 그 선생님 말투가 애들 사이에서 유행어가 되었다. 애들은 "땡땡아, 학교 가자." "땡땡아, 놀러 가자." "땡땡아, 산에 가자"라고 말하며 친구들을 불러댔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얼굴 호건 애들이 교회에 많이 다녔다. 교회에는 우리 학교 말고 동국민학교, 서국민학교, 남국민학교 애들도 있었다. 개들은 나처럼 때국물이 질질 흘리는 시꺼먼 애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다른 국민학교 애들이랑도 잘 어울렸다. 교회에서 만났던 애들은 나중에 중학교 가서 다시 만나게 되어 너무 반가웠었다. 나는 노래를 못해서 노래 잘하는 애들을 좋아했었다. 찬송가를 잘 부르는 남초등학교에 다니는 땡땡이랑 친해지고 싶어 했다. 그 애는 키가 크고 눈은 옆으로 여우처럼 찢어졌었다. 그 애는 그 시절에 작사, 작곡을 했었다. 그 애가 만드는 노래라며 그 애 친구들이 부르고 다녔다. 중학교 때도 그 애랑 친해지고 싶었는데 같은 반이 한 번도 안 돼서 서로 얼굴만 아는 정도의 사이로 그치고 말았다. 둘째 아이가 초 2 때 육아휴직하고 학부모였던 중학교 동창이랑 놀다가 그 애를 다시 만나서 참 좋았다. 그 애도 나처럼 시집가서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었다. 그 애는 여전히 음악을 좋아해 집에서 피아노도 치고 기타 치면서 시간을 많이 보낸다고 했다. 나는 그 애에게 교회에 다닐 때 친해지고 싶었다는 마음을 그때서야 전했다. 그 애는 인자부터 친하게 지내자고 했다.
교회에 가면 교회의자에 앉아 목사님 말씀을 제일 먼저 들어야 했다. 목사님도 교장 선생님처럼 오랫동안 말을 하셨다. 목사님 말씀 중에 물고기 다섯 마리와 빵 몇 개로 오천명이 먹었다는 이야기나 봉사가 갑자기 눈을 떴다는 말들이 다 뻥 같이 느껴졌다. 하나님이 어쩌고 저쩌고, 예수님이 어쩌고 저쩌고, 죽었는데 7일 만에 살아나고 이런 말들이 황당무계하게 들렸다. 나는 사람은 죽으면 썩어서 흙이 된다고 어른들에게 어려서부터 들어서 도저히 그 말들이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목사님은 맨날 천국이 어쩌고 저쩌고, 지옥이 어쩌고 저쩌고 믿을 수 없는 말만 늘어놓았다. 목사님은 설교도 길게 했고 기도도 길게 했다. 기도시간이 되면 나는 고개만 숙이고 눈을 감지 않고 있다가 곧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가 나처럼 눈 뜨고 있는 친구와 마주치면 '메롱'거렸다. 그럼 상대도 언제나 나처럼 혀를 낼름낼름거렸다.
목사님 말씀이 끝나면 학년별로 모여서 성경을 배웠다. 어린이들은 목사님 집에서 성경공부를 했다. 성경을 가르쳐주신 선생님은 젊고 예쁜 여선생님이었다. 나는 맨날 그 예쁜 선생님께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아나냐? 못 걷던 사람이 어떻게 걸을 수 있냐? 예수님이 의사냐? 어떻게 물이 갈라지냐? 물 위를 어떻게 걷냐? 라며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따져 들었다. 그럼 선생님은 웃으면서 의심하지 말고 그냥 믿으라고 했던 것 같다. 혼자 있을 때 대접에 물을 받아 놓고 '반으로 갈라져라, 갈라져라, 할렐루야, 아멘, 아멘'을 외쳤지만 예수님의 마법이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았다.
목사님께서 진심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다 들어준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나는 그말을 믿고 진심으로 기도했다. 시험 전 날에는 '북한이 쳐들어오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학교 가기 싫을 때는 '태풍 불어 내일 학교 안 가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돈이 필요할 때는 '오백 원만 아니 백 원이라도 땅바닥에서 줍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학교 끝나고 집에 갈 때는 '하나님 엄마가 일 안 가고 집에 있게 해 주세요.'라고 수십 번 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한 번도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교회에서 찬송가 부르는 게 좋았다. 어떤 때는 찬송가를 듣기만 했다. 찬송가가 교회에 울러 퍼지면 온몸에 전율을 느껴졌다. 그때 부른 찬송가를 아직도 기억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었으니,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3장 16절.' 이 찬송가를 진짜 많이 부르고 다녔다. 이 찬송가는 지금도 나에게는 동요처럼 들린다. 한 번씩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불러보기도 한다.
나는 교회에서 '할렐루야'라고 말하는 게 좋았다. 꼭 마법사의 주문처럼 느껴졌었다. 시골에서 사니 혀 꼬부라지는 말은 거의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교회에서 '할렐루야 ' ' 할렐루야'라는 혀 꼬부라지는 소리를 하는데 어감이 너무 재미있었다. 나중에는 할렐루야를 예수님이 하는 마법 주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마법으로 행한 거라 여겼다. 또 어떤 날은 그 말이 너무 재미있고 좋아서 말끝마다 할렐루야를 붙이기고 다니기도 했다. "땡땡아, 어쩌고 저쩌고 할렐루야."라고 말했다.
아부지는 언제나 양심 있는 어른이었다. 딸이 공짜로 교회 봉고차 타고 초코파이랑 달걀, 요구르트 얻어먹고 다닌다고 생각해서 교회 갈 때마다 백 원씩 주셨다. 헌금통이 예배 중인지, 찬송가를 부를 때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언제나 앞자리에서 뒷자리까지 돌아다녔고 그때 헌금을 냈다. 처음에는 헌금통에 돈을 넣었지만 나중에는 넣는 척만 하고 안 내고 문방구에서 귀때기 과자를 사 먹었다. 헌금통에 있는 돈을 헌금하는 척하면서 훔치고 싶은 욕망도 가끔 생겼지만 다행히 한 번도 훔치지 않았다. 지금도 그 욕망을 꾹꾹꾹 누른 나 자신을 칭찬한다.
교회 가면 맨날 간식을 줬었다. 그런데 간식의 종류는 잘 생각이 안 난다. 교회에는 재미있는 것들이 많아 가지고 그런지 간식 먹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때 같이 교회 다니던 애들 중에 지금도 교회에 다니기는 애들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진득하게 의심하지 말고 믿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성인이 되어 성당에서 성경을 필사하다 보니 성경구절에 좋은 말도,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교회 다니는 일을 좋게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은 교회든 성당이든 다니게 하고 싶었다. 큰애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아파트 앞 교회에 작은 애랑 보냈었다. 아파트 앞 떡볶이집 아주머니가 교회에서 집사라고 했다. 그 아주머니에게 애들을 교회에 보내고 싶다고 말해서 보냈었다. 애들이 교회에서 과자, 색연필, 문구세트를 받아오며 즐거워했었다. 나도 우리 아부지처럼 양심있는 어른이어서 애들에게 헌금하라고 천 원씩 줬었다. 교회에서 애들은 신나는 율동까지 하면서 찬송가를 불렀다. 찬송가를 율동과 함께 한다는 것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애들도 서너 달 다니다가 교회를 그만두었다. 교회 다니는 친구들이 내가 다녀야 애들도 다닌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의심이 많았기에 다니지 않았다. 초등학교 1학년인 큰애가 작은애 손잡고 교회를 가는 모습을 아파트 베란다에서 바라볼 때 얼마나 뿌듯했었는지 모른다.
우연히 교회에 다니는 학생들이 많은 학교에 근무하게 되었었다. 그 학교 학생들은 참 예의 바르고 착하고 밝고 명랑했다. 지금까지 근무했던 학교 중에서 그렇게 착한 애들은 보다 보다 처음 봤었다. 그래서인지 누가 교회 다닌다고 하면 다 착하게만 보인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나는 잘 모른다. 어쩌면 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교회는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 애들이 나처럼 교회에서 재미있는 경험을 많이 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