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수업을 하거나 학교를 돌아다니다 보면 유난히눈이 초롱초롱한 학생들이있다. 땡땡이도 그런 학생이다.
5학년 복도에 '세상을 빛낸 위인'이라는 오래된 액자가 걸려있었다. 액자 속 위인10명 정도가 남성이었다. 여성은 고작 2명이었다.학생들은 '역시 남성이야. 세상을 빛내는 일, 중요한 일은 남성들이 하는 거야.'라는 성고정관념이 생길 수도 있다.
보건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 5학년 복도에 보면 세상을 빛낸 위인이 대부분 남성이던데 위인에남성이 많은이유는 뭘까?
라고 물었다. 그러자 땡땡이가
-역사가 남자들 위주로 쓰여져서 위인에 남자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옛날에는 여자들이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위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여자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또여자가 위인이어도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남학생이 이런 대답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땡땡이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른 학생들과 달랐다. 보건수업을 하다 보면 다양한 사회문제들을 다룰 수밖에 없다. 땡땡이는 사회적 문제에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땡땡이 같은 멋진 학생을 학교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행운이다.
땡땡이가 6학년이 되었다. 며칠 전 땡땡이가 머리가 아프다며 보건실에 왔다. 원래 모범생들은 보건실 같은 곳은 가지 않는다. 언젠가 사서 선생님과 학교 도서관은 모범생이, 보건실은 부적응 학생이 다닌다는 우스갯소리를 한 적이 있다.
- 땡땡아, 어서 와. 보건실에서 만나니까 더 반갑다. 우리 땡땡이 어디 아파요?
-선생님, 제가 요즘 학교랑 집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요. 그래선지 머리가 자주 아파요.
변성기가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도 목소리가 아래로 축 내려가 있었다.마침 보건실에 대기 중인 학생이 없었다.나는
-아이고, 힘들겠다. 학교에서는 어떤일로 스트레스를 받니?
-반에서 cctv역할을 하고 있어요.
-cctv라고? 그럼 다른 학생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말이네.
-네
cctv는 감시다. 큰 잘못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 날 감시한다면 난 무서워서 미쳐버릴 거다. 감시를 받는 것도 무섭지만 동급생을 감시하는 것도 무서운일이라고생각한다.
보건수업을 하다 보면 다른 학생들의 발표 횟수를 체크하거나 떠드는 학생의 이름을 적는 cctv 학생들이 있다. 우리 때는 반장들이 그런 역할을 했었다. 그런 학생들은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수업을 즐기지도 못한다. 보건수업 후 슬그머니 cctv역할을 하는 학생들을 불러 보건수업시간에는 친구들을 감시하지 말라고 말한다. 물론 담임교사의 교실경영 방법 중에 하나이니 다른 시간에 감시하는 것은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내 수업시간에는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담임선생님들의 학급경영방법을 존중한다.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인인 초등교사가 아무런 생각 없이 학급을 경영하지는 않으리라. 담임 선생님은 cctv역할을 하는 학생에게 스트레스를 주려고 그런 역할을 시킨 것이 아니다.학급을 보다 잘 경영하기 위해 고심하고 고심한 끝에 그런 역할을 학생에게 부여했을 것이라고 믿는다.교육적으로도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떠한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언제부터 했는데?
-6학년 1학기부터요.
-응. 어떤 점이 힘든지 말해줄 수 있니?
-친구들이 수업시간에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데 자꾸 떠들어서 그것이 힘들어요. 제가 조용히 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고, 친구들이 선생님께 혼났는데도 계속 떠들어서 힘들어요.
-응, 그렇구나. 땡땡아, 그럼 힘들다고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려 봤어?
-네. 말씀드렸어요. 선생님께서 너무 열심히 안 해도 되고 힘들면 그만해도 된다고 했어요.
-그렇지. 너는 친구들과 동급생이잖아. 친구들이 아무리 잘못된 행동을 하더라도 너는 선생님은 아니야.친구들 입장에서는 '자기가 선생님도 아니면서 왜 저래?'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네.
-선생님도 많이 살아보진 않았지만 사람이 변하려면 스스로 느껴야 해.자신이 스스로 느껴야 변하더라고.남들이 아무리 말해도 내가 느끼지 않으면, 내가 마음먹지 않으면 절대 변하지 않더라고.선생님 딸이 공부 안 한다고 선생님이 '공부해라, 공부해라'천년만년 외쳐도 선생님 딸이 스스로 '공부해야지.'라고 마음먹지 않으면 다 소용없는 거잖아. 선생님이 공부하라고 외치는 것이 선생님 딸에게는 아주 듣기 싫은 잔소리일 뿐이야. 네가 친구들에게 수업시간에 조용히 하라고 말하는 것도 친구들이 스스로 조용히 해야겠다고 마음먹지 않는다면 친구들에게는 잔소리일 뿐이지. 누군가는 개소리라고도 말할지도 모르겠다. 친구들이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리고 스스로 변할 수 있게 기다려주자. 친구들에게 수업시간에 조용히 하라고 말하지 마. 친구들을 바꾸려 하지 말고 널 바꿔. 다른 사람을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어. 하지만 내 마음은 내가 바꿀 수 있다.
-네.
- 땡땡아, 넌 오늘부터 고장 난 cctv가 되어보면 어떨까? 너는 책임감이 많아 좀 힘들수도 있어.선생님이 혈압재고, 맥박재고, 체온재고, 산소포화도 잴 때 cctv 4곳이 하나씩 망가지는 거야. 알았지.
-네
학생이 웃었다.
-자, 지금부터 망가진다.
신체적인 문제로도 두통이 올 수 있다. 신체사정하고 문진한 결과 신체적으로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
-땡땡아, cctv 좀 고장 났니?
-네
-친구들에게 관심 끄고 네가 즐거워하는 것을 해봐. 선생님은 글 쓰고, 책 읽고, 산책하면 즐겁더라. 넌 뭐 할 때 즐겁니?
-그림 그릴 때요.
-그럼 스트레스받을 때 그림 그려. 그려도 그려도 계속 스트레스가 쌓이면 선생님처럼 글 쓰고, 책 읽고, 산책해.
-네
땡땡이의 신체사정과 문진이 끝날 때즈음 급식을 다 먹은 저학년 학생들이 또 우르르 보건실로 몰려왔다. 저학년 학생들은 참새고 보건실은 방앗간이 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땡땡이가 가정에서 받는 스트레스도 이야기 나누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여기까지만 이야기 했다.
오후에 보건실에 온다른 선생님께서 땡땡이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께서 땡땡이가 정말 멋진 학생이라고 해서기대를 많이 했었어요. 그런데 제 수업시간에 보면 땡땡이가 엎드려 있고 잠들어 있고 하더라고요. 집중도 거의 안 하고요."
그 말을 듣는데 가슴이 철컹했다. 땡땡이가 수업시간에 엎드려 있는다고? 땡땡이가 집중을 안 한다고? 도대체 땡땡이에게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작년 17시간의 보건수업 시간 동안 빛을 잃은 적이 한 번도 없는 땡땡이다. 땡땡이가 너무 걱정스러워졌다.
그날 오후 업무가 어느 정도 정리된 후 조심스레 담임선생님께전화했다.
-땡땡이가 오늘 머리가 아프다며 보건실에 와서 잠깐 이야기를 나눴습니다.땡땡이가 여러모로 많이 힘든가 봅니다. 제 생각에는 땡땡이가 상담실에서 상담을 받으면 좋을 것 같아요. 땡땡이랑 이야기 나누시고 상담실에서 상담받게 해 주면좋겠습니다.
-네. 선생님. 저도 요즘 땡땡이랑 많이 상담하고 있습니다. 저도 땡땡이를 상담실에 의뢰하려고 했어요. 다시 한번 땡땡이랑 상담해 보겠습니다. 우리 땡땡이 걱정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땡땡이가 잘 크면 좋겠네요. 퇴근 잘하세요.
-네.
보건교사 입장에서는 학생의 문제를 담임선생님과 이야기 하는 것이매우 부담스러운 일이다. 담임교사의 성향을 파악하고 학생에 대해 이야기 나눠야 한다. 무작정 이야기 나누다가는 상처받을 수 있다. 땡땡이 선생님이 나의 전화를 불편해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예전에학교에서 위기관리 위원회가 열렸었다. 그때 위기인 학생이 요즘 보건실에 자주 오는지 교감선생님이 물으셨다. 나는 학생이 보건실에 수업시간에 자주 오고 나랑 이야기할 때는 학교 생활도 즐겁고 집도 즐겁다고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회의가 끝나고 담임선생님이 보건실에 오셔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아이가 즐겁게 지낸다고 말했냐며 다짜고짜 따진 적이 있다. 나는 교감선생님이 물어서 대답했을 뿐이다. 학생을 3년 가까이 보건실에서 자주 만났었다. 담임선생님이 알지 못하는 2년 동안 그 학생은 거의 매일 보건실에 왔었다. 담임교사가 따지니 황당했지만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미안하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같으면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학생을 담임교사도 사랑하고 걱정하겠지만 나도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걱정하는 학생이었다.
내가 보건실 운영에 온 정성을 다하는 것처럼 학급은 담임교사가 온 정성을 쏟는 곳이다. 담임교사가 하루종일 학생을 관찰한다. 그런데 학생들은 담임에게 하지 않는 말을 보건교사에게 하기도 한다. 담임교사 입장에서는보건교사가 학생과 하는 짧은 상담이나 관찰이 오지랖으로 느껴질 수 있다. 초등학교 보건교사는 담임교사와의 관계에서 신경써야한다. 대부분교사들이 교대 선후배이기에 담임교사 한 명하고 관계가 틀어지면 금세 다른교사들과의 관계가 흐트러질 수도 있다. 교직원회의에서 학생의 생활지도나 교육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면'보건선생님이 뭘 안다고'라는 차가운 시선들이 느껴진다. 그런 느낌을 교육부가 비교과라고 갈라치기 한 후로 더 많이 받는다. 하지만 난 학생들을 사랑하기에 학생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면 다른 이의 눈치를 지나치게 보지 않으리라 다짐해 본다.
사춘기에 접어드는 6학년 2학기. 많은 학생들이 어려움을 겪는 시기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접어드는 땡땡이가 자신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잘 이겨내기를 바란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세상을 빛나게 하는 멋진 어른으로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