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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배 Jan 29. 2022

맥북은 그냥 닫으면 돼

하지만 딴짓도 필요한 걸

작년 12월 중순에 맥북을 구입했다. 이전 노트북이 무거워진 포토샵을 버티지 못하고 튕기기 시작했다. 다음날 바로 Macbook Air M1칩 노트북을 중고로 거래했다. 맥북을 써보고 싶기도 했고, 개발자나 디자이너라면 다들 맥북을 쓴다기에, 그리고 한 번 써본 사람은 다시 헤어 나오기 어렵다기에,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고 바로 맥북을 골랐다. 대신에 제일 싼 놈으로.


나는 맥북이 처음이었다. 내 이전 노트북들은 LG나 삼성이었고 모두 윈도우 기반이었기 때문에 맥북에 적응하는 동안에는 맥북이 왜 좋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두 번이나 수리센터에 들러 내게 최적화된 이전 노트북들은 사실 포토샵만 빼고 부족함 없었었다. 다만, 한 가지 불편한 점이 있었는데 중간에 업무를 쉴 때 그냥 덮어둘 수가 없었다. 사실 수리센터에 간 것도 일 하다가 중간에 그냥 덮으면 나중에 다시 열었을 때 열을 내뿜으며 블루스크린이 뜨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나는 업무를 쉬어야 하면 열린 창들을 다 닫고 전원을 껐다.


그 습관이 남아 맥북을 쓰면서도 어딘가 이동할 때면 하나하나씩 다 닫으면서 전원을 껐는데, 이를 본 친구가 의아하게 여겼다. 맥북은 그냥 덮으면 된단다. 그럼 이건 전원을 안 꺼도 되냐고 했는데 본인은 맥북의 전원을 끈 기억이 없다고 한다. 찾아보니 다들 그런다더라. 이제 삼성도 LG도 아니니 그 뒤로는 나도 창을 닫지 않고 그냥 노트북을 덮었다.


열면 바로 하던 작업을 이어나갈 수 있어서 아주 편리했다. 덕분에 불필요한 로딩 시간들이 많이 줄었다. 하지만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마치지 못한 일은 그냥 덮어두면 되니 작업이 끝날 때까지 작업창을 닫지 않게 된다. 그러니까 끝나지 않은 작업들은 계속 켜져 있다.


지난 3주 동안 작업들이 끊이지를 않았다. 디지털 콘텐츠를 발행하고 매거진을 제작하여 펀딩을 진행하는 프로젝트 하나 시작했는데, 그 일과 대시보드 제작과 주 3회 스터디 준비까지 하면서 쉴 틈이 없었다. 각종 프로그램은 다 켜 둔 것 같았다. 잠을 잘 때도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잔다기보다는 더 이상 작업할 체력이 남아 있지 않아 맥북을 덮어두고 쓰러졌다고 보는 게 맞다.


다음 날이 되면 다시 맥북을 연다. 어제 했던 작업이 그대로 있다. 그냥 어제의 일을 그대로 하면 된다. 잠깐의 쉴 틈도 돌아볼 필요도 없이. 새로운 감정이었다. 그렇지만 좋지만은 않은 감정이었다. 포털사이트에서 뉴스도 보고 재밌는 글도 읽고 딴짓할 시간도 좀 필요한데, 그럴 필요조차 없다. 딴짓은 생각보다 건강한 일이었다. 뭐랄까, 몸에 좋지는 않지만 한 번에 과식하지 않도록 꾸준히 먹는 간식 같은 느낌. 배가 적당히 차 있어야 그동안 꾹 참았다는 보상심리에 폭식하는 일이 없으니까 말이다.


맥북은 공장이었다. 불 꺼지지 않는 공장. 날이 바뀌고 일을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가짐 따위는 필요 없이 그냥 생산라인에 앉아 일하는 기분이다. 공장 문 열리자마자 순간이동해서 앉은 기분이다.


책갈피 없이 책을 덮을 때. 앞뒤 가리지 않고 책갈피를 정확하게 넘겨 내가 읽은 곳으로 향할 때. 다른 활자들은 그저 스쳐 지나간 것들이 되어버리고 앞으로 읽힐 글자들은 나머지도 그럴까 두려워할 것 같다. 더듬거리더라도 읽은 부분은 또 읽고 아직 만나지 못한 부분에는 기대를 갖도록, 책갈피 없이 책을 덮는다. _'21년 4월 18일 일기 중

잠깐의 여유나 딴짓할 시간. 생각보다 더 중요한 시간이다. 학교 다닐 때도 순 공부시간을 늘리겠다고 앉자마자 문제 풀고 강의 진도를 나갔던 적이 있다. 물론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때보다는 강의 보면서 남들이 올린 질문도 좀 읽고 커뮤니티에 강의 검색도 해봤던 때가 훨씬 건강했다. 그래도 그때는 탐색의 여정이라도 있어서(어쨌든 책을 펼치고 과거의 풀었던 문제들을 지나가야 하니까.) 이상한 기분은 안 들었는데, 지금은 다른 세계로 바로 접속하는 기분이 든다. 이러다가 맥북 열기를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 열면 끝나지 않은 일더미가 쏟아지는 걸.


그래서 요즘에는 불편해도 창을 닫는다. 어차피 한 번에 한 가지 일밖에 못할 것을, 여러 창 열어두고 짐처럼 쌓아둘 필요가 없다. 필요할 때 열면 된다. 언제 또 적응해서 이상한 기분을 느끼지 않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이렇게 살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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