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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 Dec 02. 2023

심사위원 데뷔하던 날

생각을 바꾸면 인생은 더 재미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2023년은 특별하다. 반복되던 베트남에서의 일상에 새로운 경험과 도전이 생겼다. 처음 베트남에 왔을 땐 한국을 떠났다는 것만으로도 매일이 여행처럼 재미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1년 정도 지내고 보니 베트남이라는 나라가 심심해도 이렇게까지 심심할 수가 없었다. 결석 한 번 없이 어학당에 다닌 것도 다 그런 이유였다. 공부라도 해야지. 학교라도 가야지.

내가 그리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돌아다니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베트남에 살면서 알았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베트남에 처음 왔던 14년 전만큼이나 재미있어졌다.


노래자랑 심사위원 해볼래?

아이 텀방학을 맞아 오랜만에 무이네(호치민에서 3시간 떨어져 있는 바닷가)로 휴가를 떠난 차였다. 휴가 중에도 일 하느라 바쁜 남편이 뜬금없이 심사위원을 해보지 않겠냐고 했다. “내가 어떻게 해…”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어쩐 일인지 “재밌겠다. 해볼래!”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음악 프로그램 작가도 해봤으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간 수없이 듣고, 선곡하고, 무대를 봐왔으니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행 중이었기 때문에 흔쾌히 수락했던 것 같다. 여행은 많은 것을 무장해제시키고, 평소 안 하던 것을 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지금도 계속 한국에서 일하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심사위원이 아니라, 심사위원을 섭외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도 늘 그 자리를, 현장을 그리워하지만, 그 덕분에 심사위원으로 초대받았으니 행사 규모를 떠나 영광일 따름이다.

초대받은 행사는 한글날을 맞이하여 호치민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의 한국 노래경연대회였다. 해외에서 외국인들이 저 바다 건너 나라의 언어의 탄생을 기념하며 축제를 연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노래대회에는 모두 10팀이 나왔다. 3시간 동안 진행된다는 말에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예상 밖의 선곡과 노래 실력에 생각보다 더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특별 순서도 있었다. 한국 사람보다 더 멋지게 한국어로 드라마 <도깨비>의 OST를 부른 베트남 가수도 있었고, 대학 동아리 학생들의 축하 무대도 있었다. 인기 많았던 초대 가수와 같이 사진 찍을 걸 그랬다. 같은 대기실을 써도 누군지 몰라 그저 서로 대면대면 앉아있었는데, 이렇게 인기 많은 가수였을 줄이야.  

심사위원은 나를 포함해 모두 4명이었다. 베트남 음악 전문가 두 분과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시는 한국 선생님, 그리고 음악프로그램 작가였던 나. 막상 심사위원석에 앉고 보니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지만, 귀와 눈을 믿는 수밖에. 비슷비슷한 실력 중에서도 분명 더 반짝이는 누군가가 있으리라.

대회가 시작되기 전 먼저 심사위원들을 소개하고, 무대에서 감사의 꽃다발과 감사장을 받았다. 진행을 맡은 MC도 한국어를 전공했다고 했다. 그는 배운 사람답게 내 이름을 또박또박 정확한 발음으로 불러 주었다. '해오 쥬응 언'이 아닌 '허정은'.  

역시 전공자는 다르다. MC로 대성하길!

뉴진스의 '하입보이를' 부르고, 트로트를 부른 참가자도 있었지만, 나를 감동시킨 선곡은 '홀로아리랑'이었다. 한복을 입고 나와 한국인의 정서를 이해하고 부르려는 정성에 감탄했다. 베트남에서 홀로아리랑을 듣게 될 줄이야. 한국어 발음 점수 높음! 의상 점수 높음! 무대 매너, 창의력, 가창력 모두 높음! 높음! 높음! 그 정도의 노력이면 저고리를 거꾸로 맨 것쯤이야 넘어갈 수 있다.

베트남 심사위원도 그의 무대를 보다가 나를 향해 엄지 척해주었으니, 한복과 선곡에 치중된 점수가 아닌 모두가 인정한 실력이었다. 그 학생은 어디에서 '홀로 아리랑'을 듣고 알게 되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행사가 끝나고 그녀에게 축하인사와 함께 국악을 배워보는 건 어떻겠냐고 넌지시 말해주었다.


모든 참가자들의 순서가 끝나고 전체 심사평을 들어보는 시간이 있었다. 늘 이름이 불릴 때는 내 이름을 놓치지 않게 긴장하지만, 진행자는 또 한 번 내 이름을 또박또박 부르며 오늘의 소감을 물었다.

"(한국어) 작가님 오늘 어떠셨습니까?"

"(한국어) 베트남이 아니라 한국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주신..."


베트남 학생들의 축제였지만, 한국어를 전공하는 학생들이다 보니 의사소통 걱정 없이 한국어로 마음껏 말할 수 있어서 좋았다. TV 예능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심사위원의 독설은 없었다. 모두 함께 아름다운 축제의 현장이었다. 수상은 장려상 7명과 1, 2, 3등. 탈락자 없이 모두가 상을 받았다. 그리고 내가 1등 시상자로서 가장 큰 기쁨을 함께 나누고 축하해 줄 수 있었다. 심사위원 중 음악 전문가들이 세 분이나 계셨는데, 아마도 내 이력이 색다르게 느껴졌는가 보다.  


나는 부정적인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다. 습관처럼 튀어나오는 “난 안 돼”, “난 못해”, “내가 그걸 어떻게…” 이런 말 때문에 놓치고 후회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언니도 해 봐요. 잘할 거 같은데… 그리고 잘하는 게 뭐가 중요해요.”

“아냐… 난 못해. 넌 능력이 많아서 좋겠다.”

“언니는, 왜 자꾸 언니가 못한다고 해요?"


똑똑하고, 미술과 음악에도 재능이 뛰어나 취미 부자인 친구가 있었다. 늘 그 친구의 재능을 부러워하는 나를 그 친구는 답답하게 생각했다. 왜 자꾸 못한다는 말을 먼저 하냐는 친구의 말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는 듯했다. 너무 습관이 되어 있구나.

그 후로 "난 못 해"라는 말 대신에 한 번은 더 생각해 보게 되었다. 3번은 거절하고 본다는 겸손의 태도도 때로는 버리기로 했다. 그렇게 부정적인 습관들을 이겨내려는 노력이 나를 심사위원이라는 자리까지 이끌어주었다.


"다음에 또 초대해 주세요."


돌아오는 길에는 그 사이 친해진 심사위원 선생님과 신나게 수다 떨었으니 얻은 게 많다.

경험도. 사람도. 용기를 내면 얻는 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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