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 보고

산티아고 순례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 / Day 9 / 278.9km

by 한성호

왜 프로 선수들의 스포츠 경기를 보면, 공기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노력한다는 이야기들을 하곤 한다. 자세를 바꾸기도 하고, 경기복을 바꾸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한편으로 ‘그래 봐야 얼마나 차이가 난다고'하며 콧방귀를 뀌곤 했는데, 오늘 그 ‘공기의 저항'이라는 것이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깨달았다.


걷는 내내 불어오는 맞바람에, 한 걸음 한 걸음이 꽤 무거웠던 하루다.


산토도밍고 - 벨로라도.png 오늘의 루트


어제 걸었던 거리에 비하면 총 22km로 긴 거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대체로 쉬운 평지코스였음에도 불구하고, 불어오는 바람의 영향으로 참 힘들었던 하루다. 그러고 생각해보니, 어쩌면 어제 그렇게 긴 거리를 걸으면서, 그리고 여태까지 걸으면서 힘들었지 않았던 것은 나도 모르는 새에 뒤에서 밀어주는 바람의 영향이 컸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바람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어제 그렇게나 기분 좋게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컨디션이 그렇게 썩 좋지는 않다. 맞바람을 힘겹게 헤쳐 나가야 했기 때문에, 그래서 온 정신이 걷는 데에만 팔려 있었기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제의 난 이만큼 했으니까 오늘은 더 할 수 있어'하며 욕심을 냈기에,

자꾸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며 걸었기 때문에, 오늘의 걸음은 조금 후회스럽다.

모처럼 날씨도 좋았고, 주변의 풍경도 아름다웠는데,

까미노가 끝나고 나서 아쉬웠던 구간을 꼽으라면 이 구간을 꼽을 만큼, 나는 오늘 너무 바보처럼 무식하게 빨리 걸었다.




5D57F729-5FCC-46CE-B17B-CDB675386FB5.jpeg 태어나서 이런 풍경은 또 처음이다


그 김에 근황 보고를 좀 해야겠다.


우선 나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


빨래는 매일 샤워하며 손빨래를 하고 있다. 날이 좋다기 보다도, 라디에이터가 빨래를 아주 바싹 잘 말려주기 때문에, 밤새 바싹 마른 옷을, 아침에 기분 좋게 입고 시작할 수 있다. 덕분에 혹시 몰라 챙겼던 옷들을 입을 일이 없다. 매일 계속 같은 옷을 입고 있다. 그 때문일까, 아니면 빨래를 잘 못한 탓일까, 옷의 겨드랑이 부분이 파랗게 물들어서 민망하다. 누가 보면 파란색 땀을 흘리는 걸로 착각할 만큼, 아주 널찍하니 파란색 반점이 자리 잡았다. 이 티셔츠는 더 이상 입지 못 할 것 같으니까, 까미노에서 만난 사람들의 한 마디씩을 담아 기념품 삼으면 어떨까 싶다.


챙겨 온 경량 패딩은 이불이 없는 알베르게에서 이불 대용으로 쓰고 있다. 사실 걷다 보면, 체온이 금세 올라가서 경량 패딩을 입을 일이 거의 없는데, 이불로 쓰기엔 딱 좋다. 지퍼를 잠가 최대한 침낭처럼 만들고, 바지처럼 입으면 나름 침낭 같다. 한참 짧은 침낭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덮을게 필요 없는 건 아니다. 엄연히 이 경량 패딩은 추위를 막아주는 용이지, 포근함을 만들어주는 이불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기 때문에 이불 대용으로 쓰고 있는 것은 가끔 알베르게에서 나눠주는 일회용 침대 시트다. 얇디얇은 시트긴 하지만, 이불을 덮는 시늉을 할 수는 있어서 나름 포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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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종종 보이는 귀여운 낙서들 / 산티아고까지 576km

아침은 양이 적더라도 꼬박꼬박 잘 챙겨 먹고 있다. 글쎄, 까미노를 시작하며 아침을 걸러본 적은 없어서, 아침이 나의 체력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빵 쪼가리를 먹더라도 잘 챙겨 먹고 있다. 점심은 하루를 제외하곤 전부 아침에 남은 빵에 살라미를 얹어 먹거나 잼을 발라서, 걷는 중간에 쉬면서 먹는다. 그러나 내일은 빵이 아니라 삶은 계란을 싸가지고 출발할 예정이다. 어젯밤 숙소에서 만난 한국인 어르신들이 계란을 삶으시던데, 그 모습에서 한 수 배웠다. 훨씬 간편하고 부피도 적으니까, 괜찮은 점심식사가 될 것 같다. 저녁은 식당에서 순례자 메뉴를 먹거나(약 10유로 대에서 파스타와 메인디쉬(예를 들면 치킨 휠레) 그리고 와인까지 맛볼 수 있다.) 알베르게에서 대충 만들어 먹고 있다. 며칠 전까지는 우리 해적단의 요리사 욱희가 맛있는 걸 많이 해줬었는데, 이젠 그런 욱희가 없다. 내가 욱희에게 어깨 넘어 배운 실력으로 따라 해 보곤 하지만, 도통 그 맛이 나질 않는다. 벌써 욱희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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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열심히 잘 까불고 있다.


글쎄, 나의 생활적인 부분보다, 나의 건강이 궁금한 사람도 꽤 많을 테다. 까미노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어쩌면 ‘얼마나 힘들까?’하는 생각일 테니까 말이다.


우선 발의 상태를 이야기하자면, 나는 새 신발을 신고 오래 활동하더라도, 물집이 잘 잡히지 않는 편이다. 군대에서 100km짜리 행군을 할 때도 걷는 내내 뽀송뽀송한 발을 유지했을 정도로, 발에 땀도 없고, 물집이 잘 잡히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신은 신발이 문제인지, 아니면 하루 평균 25km가량을 벌써 9일째나 걷고 있어서 그런지 물집이 아주 많다. 왼발 오른발을 합쳐 총 6개의 물집을 보유한 상태다. 그중 뒤꿈치에 있는 물집 친구들이 아주 많이 나를 괴롭힌다. 나머지는 건드리지만 않으면 걷는 동안에도 아프거나 하지 않는데, 뒤꿈치 친구들은 어쩔 수 없이 자주 닿는 곳이다 보니 정말 정말 아프다. 글쎄, 뒤꿈치의 물집은 새로운 물집이라 아픈 걸 수도 있겠다. 조만간 뒤꿈치의 물집 친구들도 적응이 될 테다.


그리고 물집보다 희한한 상황이 생겼다. 손이 알레르기처럼 오돌토돌 무언가가 올라왔기 때문이다. 이건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다. 스틱 대용으로 쓰고 있는 나무 막대가 옻나무라서 옻이 올랐나 싶을 정도로, 손등이 정말 정말 간지럽다.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점점 부위가 넓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이걸 밤새 긁어대느라 잠을 설치기까지 한다. 그래도 2차 감염은 막아야 하니까, 자꾸 긁거나하면 안 될 텐데, 주체가 안된다. 오늘 오는 길에 약국이 있길래, 약국에서 알레르기 크림을 사다가 발랐으니 내일은 상태가 좀 나아져야 할 텐데. (긁적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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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풍경


많이씩 걸어서 그런지 하루 앞서 시작했던 사람들을 따라잡았다. 이렇게 번 시간으로 뭘 해야 할지 고민이 든다. 빨리 걷는다고 상을 주는 건 아니지만, 내가 얼마나 빠르게, 그리고 많이 걸을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그래, 그래도 여태 잘 걸어온 거 보면, 뭐 세계여행을 똥구멍으로 하진 않았나 보다.


아무튼, 중간 점검, 근황 보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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