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내가 있으니까

스페인 순례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 / Day 10 / 312.2km

by 한성호
벨로라도 - 아타푸에르카.png 오늘의 루트


중학교 때 나의 학교는 같은 이름의 고등학교와 함께 있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중학생에게 어울리지 않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운동장을 쓸 수는 있었다. 하지만 등굣길이 정말 힘들었다. 중학교 건물은 고등학교 건물을 넘어서도, 한참이나 더 올라가야 있었기 때문에, 아침마다 계단을 오르는 일이 정말 정말 힘들었다.

대학교 때는 학교의 정문에서부터 본관 건물 바로 앞까지 ‘66계단'이라는 이름이 붙은 계단이 있었다. 정말 계단이 66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 역시 꽤 힘들었다. 이미 지하철역에서부터 가파른 언덕을 올라왔기에 66계단 바로 앞에 서면 막막함부터 밀려왔다. 게다가 본관 8층에 수업이 있고, 건물에 두 대 밖에 없는 엘리베이터가 만원일 때면, 가파른 언덕 + 66계단 + 8층 높이의 계단을 올라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군 복무를 할 때도 나는 꽤나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했다. 대부분의 군부대가 마찬가지겠지만, 훈련 교장들이, 그리고 부대가 관리해야 하는 진지들이 전부 가파른 언덕 너머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고개를 ‘태풍 고개'라고 불렀는데, 훈련을 위해 모든 장구류를 착용한 채 고개를 넘고, 삽과 포대자루를 이고 지며 고개를 넘을 때면, 죽을 것만 같았다.

오늘은 꽤 높은 언덕을 넘는 코스여서 겁부터 먹었지만, 생각보다 할만했다. 첫날 피레네 산맥을 넘었던 그때만큼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넘진 않았다. 물론, 객관적인 수치로 따져봐도 훨씬 덜 힘든 언덕이긴 했지만, 왜일까? 왜 나는 이런 언덕이 수월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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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전의 날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학창 시절의 계단들, 군 시절의 태풍 고개, 그리고 첫날의 피레네 산맥이 있었기에,

수월하게 언덕을 넘는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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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하루를 기록하다 보면, 여러 번 반복하게 되는 이야기가 있다. 자주 반복하는 것만큼 그 이야기는 꽤나 중요한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일 테다.


예전에 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과거의 네가 오늘의 너를 만들었고, 오늘의 너는 미래의 너를 만드는 거다.’


그래 맞다. 과거의 언덕들이 있었기에, 수많은 고개를 넘었던 내가 있었기에, 오늘의 나는 훨씬 더 수월하게 고개를 넘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나는 미래의 나에게 어떤 식으로 도움을 주게 될까?

오늘은 앞으로 남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첫 번째 날이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어떤 식으로 첫 단추를 끼워야, 내일의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첫 단추를 잘 끼워야겠다는 부담감은 갖지 않더라도, 항상 되새겨 볼만한 말이라고 느낀다. 오늘의 나의 모습은 미래의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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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보니 별거 아닌데, 이 비석을 만날때마다 반갑다

오늘은 30km를 걸어 Belorado(벨로라도)에서부터 Atapuerca(아타푸에르카)까지 이동했다. 신기하게도 이제는 30km를 걷는 일이 그렇게 힘들게 느껴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20km만 넘어가도 언제 이 걸 다 걷나 생각하며 막막함이 앞섰는데, 이제는 ‘30km 정도 걷는 거면 괜찮겠는데??’라는 생각이 앞서니 말이다.

물론 오늘 더 짧게 걸을 수도 있었다. 어차피 대도시 부르고스가 목전이라, 어디서 머물더라도 부르고스에서 멈추게 될 테니, 짧은 거리를 걸어도 괜찮았다. 하지만 내일 부르고스에서의 시간을 조금 더 즐기려면 최대한 부르고스 가까이로 이동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일찍 부르고스에 도착해서 둘러볼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아타푸에르카보다 부르고스와 훨씬 더 가까운 마을이 있긴 했다. 하지만 비수기인 탓에 문을 열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내일은 20km가량만 걸으면 되겠다.


IMG_8467.JPG 산티아고까지 518km!!


손의 상태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어젯밤은 정말 너무 간지러워서 잠이 안 오더라. 긁지는 못 하니까 손을 계속해서 주무르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 때문에 새벽 3시가 다 되어서야 잠들 수 있었다. (긁는 것과 주무르는 것이 크게 다를 것 같지만 않지만 말이다.) 약국에서 알레르기 크림을 사서 바르긴 했지만 어쩐지 더 심해진 것만 같다. 이제는 수포가 올라온다. 나는 그저 이 수포가 올라오는 것의 의미가 이 질병의 끝물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믿는 수밖에 없다. 지난번엔 손톱이 말썽이더니, 이제는 피부가 난리다. 정말 바람 잘날 없는 나의 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