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뎌진다는 것

스페인 순례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 / Day 11 / 343.5km

by 한성호
아타푸에르카 - 부르고스.png 오늘의 루트


아프면 병원에 가는 것이 맞다.

당장 그 아픔을 해결해야만 한다.


하지만 만일 아픔이 적당한 아픔이라면, 우리는 그냥 아픔을 그대로 방치하고는 한다. 나 같은 경우엔 특히나 더 그렇다. 나는 병원에 잘 가지 않는다. 병원에 가더라도 그저 일시적으로 아픔을 해소해주는 약만 처방받을 뿐,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아픔을 참는 일이 많아졌다. 아픔에 감각이 무뎌져서, 아픈 것을 아프지 않다고 느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이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픔을 방치하는 게 좋은 일은 절대 아니겠지만, ‘무딤’을 기르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이게 또 나쁘지만은 않다.

사실 이건 내 발에 대한 이야기도 하다. 몇 번 이야기했지만, 요 근래 위 같은 상황을 자주 마주하고 있다. 하루를 시작하며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면, 절뚝거리며 걸을 정도로 발이 무지막지하게 아프다. 그런데 그걸 참고 걷다 보면 어느새 아무렇지 않게 걸을 수 있게 된다. 아픔에 무뎌지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언제 발이 아팠냐는 냥 남들과 똑같이 걸을 수 있게 된다. 물론, 그러다가 잠깐이라도 쉬었다가 걸으면, 처음 첫 발을 내디딜 때처럼, 또 아픔에 무뎌지는 시간이 필요하긴 하지만, 아픔에 무뎌진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꼭 지금의 내 발뿐만이 아니라, 살면서 이런 일은 다분하다. 물리적 상처뿐 아니라 마음의 상처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말이다. 맘 속의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아픔에 무뎌지는 때가 오고는 한다. 내가 지금 어떤 상처들을 안고 사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그래, 어떤 상처인지 명확히 잘 모르겠는 걸 보면, 어떠한 상처로 인해 생긴 맘 속 생채기가, 그리고 그 생채기가 주는 아픔에 많이 무뎌졌나 보다. 이렇게 무뎌지고 무뎌지다가, 아픔에 익숙해져 아무렇지 않게 걸을 수 있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나의 발처럼, 자연스럽게, 없던 일처럼 되기를 바라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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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엔 안개가 가득했다.


손의 상태가 시급하다. 무뎌짐을 이야기했으니 말인데, 지금의 나는 간지러움에 좀 무뎌지고 싶다. 더 이상 간지럽고 싶지 않고, 더 이상 긁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등 위에 터지지 않는 수포는 계속해서 올라오고, 나는 계속해서 손등을 긁고 있다. 하지만 이제 원인 정도는 짐작할 수 있겠다. 함께 걷는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증세가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형석이와 지영이 형님의 귓바퀴 쪽에 나의 것과 비슷하게 생긴 수포가 생겼다. 그리고 그들에게 물어보니 꽤나 그것이 간지럽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나 또한 귓바퀴가 슬슬 간지러웠는데, 확실한 건 내가 들고 다니는 나무 막대기 때문에 생긴 알레르기는 아닌가 보다. 아마 햇빛 때문에 이런 증세가 생긴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아니 그런데 베트남에서 지낼 때, 그렇게나 햇빛에 많이 노출되었는데, 아주 짧은 반바지를 입고 오토바이를 탈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여기선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그건 또 모르겠다. 스페인 햇빛은 뭐라도 조금 특별한 건가? 아무튼, 원인은 알았으나, 아직 해결 방법은 모른다. 그저 아픔에, 간지러움에 조금 더 무뎌지기를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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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이걸 다 걷지


오늘은 아타푸에르카에서 대도시 부르고스로 이동했다. 오늘 루트의 난이도는 초반에 잠깐 언덕을 넘었던 것을 제외하고, 평이했다. 부르고스가 워낙에 큰 도시라서 그런지, 언덕을 내려온 이후에 걸었던 길의 절반 정도는 전부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이었다. 글쎄, 푹신푹신한 흙길이 아니어서일까, 오늘따라 발이 너무 아팠다. 19km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30km 이상 걸었던 날들과 비슷한 수준의 통증을 겪었다.

첫발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신기하게도, 나도 모르게 마음가짐에 따라 몸이 저절로 세팅되나 보다. 30km를 예상하고 걸으면 20km까진 아무렇지 않다가 25km 정도를 걸었을 때부터 힘들던데, 20km를 예상하고 걸으면 15km 정도를 걸었을 때, 벌써부터 힘들다. 참 1차원적인 깨달음이지만, 목표를 크게 잡아야 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상태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내 발에게 매일 아침마다 속삭여야겠다.


“오늘은 50km 걸을 거다 이 자식아 ^^”


부르고스 시내를 둘러보기 위해서 일부러 최대한 부르고스 근처에서 지난밤을 보냈는데,

발이 너무 아픈 탓에 제대로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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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스의 풍경


그래도 대도시 부르고스에서 나름 재미난 시간들을 보냈다. 입장료가 아깝다는 핑계로 성당 내부에 있는 박물관을 구경하진 않았지만, 부르고스 대성당도 구경하고 사진도 많이 찍었다. 마을 뒤편에 있는 조그만 동산에 올라 부르고스 전체를 내려다보는 여유도 즐기고, 도시의 골목 여기저기를 누비며 이런저런 구경을 하는 일이 즐거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르고스가 좋았던 이유는, 욱희와의 재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날 욱희는 로그로뇨에서 멈추는 바람에 우리와 일정을 달리 했었는데, 로그로뇨에서 휴식을 조금 취하다가 버스를 타고 우리를 앞질러 부르고스로 넘어온 것이다. 우리는 나름 부르고스와 가까운 마을에서 출발한 덕분에, 알베르게가 열지도 않은 시간에 부르고스에 도착했는데, 그 닫혀있는 알베르게의 문 앞에서 욱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사실 우리를 기다린 것은 그의 기대였고, 알베르게가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데, 기대했던 대로 우리가 나타나 반갑다며 우리를 얼싸안았다. 우리는 그렇게 욱희를 다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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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은 아프지만 사진은 찍어야지


우리의 요리사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는 비싼 돈을 주더라도 맛있는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사실 이것은 끼워 맞추기 식 이유일 뿐이고, 부르고스에 도착하면 꼭 가보기로 약속한 식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보왕 형석이가 찾은 정보에 의하면 부르고스는 순대로 유명한 곳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까미노를 걷고 있는 한국인인 우리가, 순대를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다. 우리는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지나치치 못하는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형석이가 찾아둔 유명한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식당의 이름은 ‘Morito’ 글쎄, 이걸 모히또로 읽어야 할지, 모리토로 읽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브레이크 타임을 앞두고 사람이 잔뜩 들어찬 식당이었다. 꽉 차있는 식당에 자리가 날 때까지 밖에서 잠시 기다려야 할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생각보다 금세 자리를 안내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는데, 가게의 내부는 훨씬 더 소란스러웠다. 우리의 테이블도 독립된 테이블이 아니라, 옆자리에 현지인이 함께하는 셰어 테이블이었는데, 그 느낌이 참 재밌어서 기억에 남는다. 우리가 맛있다고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소란스러운 식당. 그리고 맛있었던 순대와 한치 튀김, 그리고 빠질 수 없는 맥주까지, 게다가 소란스럽지만 그게 참 잘 어울렸던 그 식당만의 분위기까지 오래간만에 정말 맛있는 식사를 했다.



이제와 또 생각해보니, 참 꿀 같은 점심시간이었다.

마치, 스페인의 시에스타 문화를 제대로 즐긴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맛있는 점심식사에 곁들인 맥주,

그 노곤함에 햇살이 가득 내리 죄는 성당 앞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던 그때가 불쑥불쑥 생각난다.


열심히 일한(걸은) 그대! 꿀 같은 낮잠이 기다리고 있다!


IMG_8798.JPG 욱희, 지영이 형, 나, 형석


분위기를 이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피자와 맥주를 포장해 숙소로 돌아왔다. 연박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 내일이면 또 긴 거리를 걸어야 하지만, 오늘 밤만큼은 풍요로운 마음을 안고 잠들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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