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순례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 / Day 8 / 252.6km
벌써 일주일 차, 셈을 하기 이르긴 하지만 산티아고 도착까지 이제 500km 미만으로 남았다.
너무 금세 끝나 버릴 것 같아서 아쉬우면서도 불안하다. 걷는 동안 나는 얼마나 성장하고 있을까, 성장하려면 한참 남은 것 같은데, 그전에 끝나버리면 어떡하지
어젯밤 호텔에서 아주 푹 잔 탓일까, 아니면 어젯밤 호텔 욕조에서 족욕을 한 탓일까, 컨디션이 많이 회복됐다. 아주 좋은 컨디션으로 하루를 걸었다. 지난번에 얘기했던 것처럼, 발이 이미 만신창이라, 아픔에 익숙해질 때까지, 그러니까 처음 시작하고 한 두 시간 정도는 아픔을 견디고 걸어야 하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그럴 필요가 없었다. 처음부터 하나도 아프지 않아서, 초반부터 쭉쭉 치고 나갔다.
쉬지 않고 걷다 보니, 어느샌가 함께 걷고 있었던 지영이 형님과 형석이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존중한다는 이유로, 그리고 각자의 템포를 존중한다는 이유로, 항상 옆에서 걷는 것이 아니라, 앞서기도 하고 뒤서기도 하면서 걷는데, 오늘 내 컨디션이 너무 좋았나 보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의 최종 목적지를 합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31.9km 지점의 Ciruena(씨루에냐)에서 만날지 (사실 이 정도 거리가 하루에 걷기 딱 좋은 정도이긴 했다.) 37.9km 지점의 Santo domingo de la Calzada(산토도밍고)에서 만날지 정하지 못한 것이다.
분명 내가 앞서 있는 건 맞는 것 같으니까, 중간중간 나오는 마을에서 커피도 마시고, 성당에 들러 쎄요도 찍으면서 그들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영이 형님과 형석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첫 번째 목적지인 씨루에냐에 들러, 한 알베르게의 와이파이를 빌려 썼다. 그때까지 나의 체력은 꽤 남아 있었기에, 그들에게 오늘 나는 씨루에냐를 넘어 산토도밍고까지 가겠다고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짧은 통보식 메시지를 남기로 6km를 걸어 산토도밍고까지 왔다. 오늘의 거리는 총 37.9km. 최장이다.
컨디션이 좋았던 탓일까, 하루 종일 왜 이렇게 신났는지 모르겠다. 걷는 내내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오늘의 코스가 너무 편했고, 풍경이 아름다워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처음으로 혼자 걸어서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절대로 함께 걷는 동행들이 있어서 불행하고, 싫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혼자 걷는 까미노의 매력을 이제야 발견한 것이다. 함께하는 이들이 날 너무 이상하게 볼까 봐, 눈치 보며 하지 못했던 스스로와의 대화도 실컷 할 수 있었고,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도 혼자서 큰 소리로 따라 부를 수 있었다.(사실 이건 함께 걸을 때도 하긴 했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신났던 건 노래를 들으며 꿈틀거리던 내적 댄스를 밖으로 끄집어낸 것이다.
이상하게 걷는데 춤이 절로 나왔다. 목적지 산토도밍고에 도착했을 때, 내가 오늘 37.9km를 걸었다는 사실이 너무 만족스러웠는지, 레드 핫 칠리 페퍼의 노래에 맞춰 춤을 췄다. 그래 오늘의 BGM은 Red hot chill peper - Can’t stop이 딱 좋겠다. 정말 말 그대로 오늘의 기분은 Can’t stop이었다.
도로 위 운전자들과 산토도밍고의 주민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마저 날 신나게 만들었다. 맘 같아선 그들의 손을 잡고 빙빙 돌려, 춤을 추고 싶은 기분이었다. 분명 나는 스스로 끼가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아무튼 여기저기 끼를 발산하며 하루를 보냈다. 어떤 아저씨는 차 속에서 나의 이상한 댄스를 보더니, 웃으며 크랙션을 울려 나의 까미노를 응원해주기도 했다. 창문 넘어 주먹을 쥐어 'Buen Camino!'를 외치시던 아저씨의 모습은 아마 평생 동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글쎄, 난 오늘 왜 이렇게 신이 났지.
이제와 생각해보면 뿌듯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힘든 길을 벌써 일주일이나 걸어서, 오늘 최장거리인 37.9km를 걸어서 뿌듯한 것은 아닐 거다. 아무튼, 내가 지금 여기에 와 있다는 사실이, 까미노에 와있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정말 이 순간에 이런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사람이 이렇게 내면을 들여다보기가 힘들다.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지치게 만들어, 단단한 피부를 파고들어야 하니까.’
어느 날 어떤 숙소 방명록에서 봤던 글이다. 나는 이 글귀에 철저하게 공감한다. 난 오늘 남들보다는 조금 빠르게, 그리고 오래 걸으며 뿌듯함을 느꼈다. 글쎄, 이 뿌듯함이 나도 모르게 나의 내면을 잠깐이나마 마주했기에 오는 뿌듯함이라 믿고 싶다. 그렇게 만난 나의 내면이 어떤지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한편으론 조금 무식한 것 같다. 이렇게나 몸을 혹사시켜서 뿌듯함을 느낀다니 말이다.
이제 555.8km 남았다.
남은 까미노 동안에도 오늘과 같은 신남, 뿌듯함을 마주 하기를!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