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 / Day 7 / 211.3km
비아나에서부터 Navarrete(나바르떼)까지 총 22km
수치로 보면 얼마 되지 않는 거리이긴 하지만, 어제 걸었던 30km만큼이나 힘들다.
오늘은 우리의 셰프 욱희와 이별했다.
욱희가 있어서 마치 만화 원피스가 완성되는 기분이었다. 욱희는 계속해서 우리의 저녁식사를 담당해줬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원피스의 주인공 캐릭터 중 하나인 상디처럼 느껴졌던 것이었다. 글쎄, 나는 무슨 역할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하루하루를 재밌게 걸었다.
그런 욱희가 무릎에 무리가 왔는지, 로그로뇨에서 잠시 쉬었다 가야겠다고 우리에게 알려왔다. 로그로뇨는 그래도 꽤 큰 도시니까, 욱희가 잠시 휴식을 취하기에 괜찮을 것이다. 우리도 그런 욱희를 따라 로그로뇨에서 멈추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그러기엔 오늘 하루 걷는 거리가 너무 짧은 게 화근이었다. 지난번 아스퀘타 이후로, 사람들이 많이 머물지 않는 소도시들을 위주로 다니게 되었는데, 사실 한 번 그렇게 대도시를 뛰어넘고 나니, 다음 대도시까지 가는 것이 거리적으로 타이밍이 맞지 않는 게 문제다. 대도시를 만나 멈추기엔 걸은 거리가 짧고, 앞에 있는 대도시까지 가기엔 거리가 멀어서, 늘 그 중간에 있는 소도시에 머물게 되는 것인데, 시골 마을을 구경하는 재미도 꽤 쏠쏠해서 지금 이 패턴이 꽤 만족스럽긴 하다.
그렇게 오늘 우리는 로그로료라는 대도시를 지나쳤다. 그곳에 욱희를 두고 오면서 말이다. 욱희와의 이별이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까, 로그로뇨에서의 휴식시간은 꽤 길었다. 그런데 그렇게 좀 쉬다 보니, 다음 마을까지 가는 일이 괘 버거웠다. 몸이 ‘어? 오늘은 여기서 쉬는 건가?’하고 풀어졌다가, 다시금 긴 거리를 걸어버리니까 나에게 배신감을 느꼈나 보다. 로그로뇨부터 오늘의 마을 나바르떼까지 걷는 데 몸이 무거워 힘들었다.
게다가 오늘은 날씨의 영향도 컸다. 걷는 내내 비가 왔다. 그래, 몸이 배신감을 느낀 게 아니라, 비가 와서 몸이 무거웠던 것이다. 마침 베트남에서 쓰던 우비를 버리지 않고 챙겨 왔기에, 가방에서 주섬주섬 우비를 꺼내 입었다. 까미노를 걸으며 처음으로 우비가 제 역할로 쓰였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이 우비를 추운 밤에 덮고 잤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럴 만도 한 게, 우비가 추위를 막는 데에 탁월했기 때문이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덕분에 날씨도 꽤 추웠는데, 우비를 입어서 그런가 하나도 춥지 않았다. 베트남에서 이 우비를 살 때 이날을 생각해서 큰맘 먹고 비싼 돈을 줘가며 튼튼한 걸로 산 건데, 오늘 그 값을 아주 톡톡히 치뤘다. 베트남이 이렇게나 나를 또 챙겨주는구나 싶다.
나바르떼에 도착해서는 문제가 있었다. 머물 숙소가 없었다는 점이다. 대도시도 아니라서 알베르게가 검색된 몇 개 없었는데, 비수기라서 그나마도 대부분 문을 닫은 상태였다. 그나마 한 군데, 연 곳을 찾아가니, 이미 사람이 꽉 차서 체크인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로그로뇨에서 시간을 보낸 게, 이런 문제점을 가져올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까미노에선 조금 부지런을 떨어야 훗날 몸이 편할 수 있나 보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선택을 해야만 했다. 비싼 돈을 주고 근처에 있는 호텔에 묵느냐, 아니면 다음 마을 나예라까지 강행하느냐.
우리의 결정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미 시간이 늦은 탓에, 나예라에 도착해서도 알베르게에 자리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는 길에 비에 충분히 젖은 탓에, 다음 마을까지 가는 일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얼른 따뜻한 물로 씻고 눕고 싶은 마음만 들었다. 우리는 다시 지도 앱을 열어 주변의 호텔들을 검색했다. 하지만 호텔들도 마찬가지로, 비수기라 영업을 하지 않는 곳들이 많았다. 하는 수 없이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호텔로 가야만 했다. 어차피 비싼 돈을 주고 묵게 될 거, 눈앞에 있는 호텔이 문을 열었으면 좋으련만, 우리에게 그런 행운은 없었다.
금전적으로 조금 무리했다. 여태까지의 숙소는 전부 알베르게였기 때문에, 가격이 착했는데, 오늘 숙소의 가격은 정말 터무니없이 비쌌다. 그래도 우리 같은 순례자 손님들이 꽤 있는지, 2명이 머무는 방에, 3명이 머물 수 있게, 서비스를 받아서 다행이다. 3명이서 방 하나의 요금을 나눠 낼 수 있으니 그걸로 만족하는 수밖에.
그래, 이 참에 푹 좀 쉬자.
욕조도 있으니까 오랜만에 뜨순물에 몸도 좀 담그고.
며칠 되지 않았지만 초반의 생각과 지금의 생각이 많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한 가지 간단한 예를 들자면 어제의 생각처럼 가방의 무게가 시작과는 다르게 무의미하게 느껴진다는 것도 달라진 생각 중에 하나다. 그리고, 내리막보다 오르막이 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달라진 생각 중에 하나다. 그리고 한 가지 또 달라진 건, 쉬는 것도 힘들다는 것이다. 처음엔 쉬었다가 출발하면 그래도 잠깐 충전하고 출발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이제는 가방을 내리는 일이 무섭다. 다시 출발하는 일이 무서운 것이다.
사실 아침에 출발하면 발이 아픈 탓에, 한 시간은 절뚝거리며 걷는다. 그러다가 몸에 열도 좀 나고, 아픔에 익숙해지면, 언제 발이 아팠냐는 냥 아픈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걷는다. 그런데, 그러다 잠깐이라도 쉬게 되면, 아침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처럼 똑같이 아프다. 차라리 한 번 시작했으면 끝까지 가는 게 더 편하다.
이런 생각을 하고 보니, 여태 나의 인생은, 쉬면서, 그러니까 무언가를 하다가 잠깐 쉬게 되었던 어떤 때에, 무너진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학교를 졸업하고 쉬면서, 다시 배우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무서웠던 것처럼 말이다.
쉬는 걸 잘 쉬어야 한다던데, 어쩌면 조금 느릴지언정 천천히 한 걸음씩 계속해서 나가는 것도 끝까지 갈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발걸음은 계속해서 앞을 향하는데, 생각들은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뒤돌아보지 않기로 몸에 타투까지 새겼는데, 자꾸만 지난날을 돌아본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내가 한 선택은 늘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믿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려 했는데, 지난날의 나의 선택들을 의심한다. 돌이킬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때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 때 저랬으면 어땠을까?’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재밌는 상상들도 있기야 하다. 하지만 대체로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 한구석이 자꾸만 불편하다.
유럽에 들어서면서 성당들을 자주 마주한다. 그리고 성당에 들를 때마다 나는 한 가지 소원을 빈다.
‘내가 한 선택이, 지금의 이 선택이 옳은 선택이라고 믿을 수 있는 힘을 주세요.’
이 까미노가 끝나고 나면, 이 소원과 조금 더 가까워져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