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순례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 / Day 15 / 457.9km
마을에 도착해서 조금 편하게 마을을 둘러본답시고 챙겨 다니는 슬리퍼로 갈아 신으면, 나도 모르게 좀비처럼 걷게 된다. 도대체 발바닥의 이 아픔은 언제쯤 사라질까.
나이가 들면서 쓸데없이 늘어났던 살갗들이 물집이 잡혀버림으로 인해 사라져 버리고, 걷는데 필요한 탱탱한 살갗들만 살아남는 기분이 든다. 걸으면서 쓸데없는 잡념들이 떨어져 나가고, 살면서 필요한 생각들만 자리를 잡아야 될 텐데, 무고한 살갗들만 바닥에 버리고 있다.
오늘은 프로미스타부터, Calsadilla de la Cueza(칼사디야 데 라 쿠에사)까지 35.9km를 걸었다. 그리고 숙소에 도착해서 장도 보고, 마을도 구경하고 하느라 2km를 추가로 걸었다. 지금 내가 기록하고 있는 키로수는 까미노의 키로수가 아니라, 나의 모든 발걸음의 합산이기 때문에, 까미노의 총길이 780km보다 훨씬 더 많은 거리를 기록하게 될 것 같다. 아무튼 오늘만 총 38km가량을 걸었다. 지난번에도 이만큼 걸었던 날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분명 이렇게 힘들지 않았는데, 오늘을 왜 이렇게 힘들까?
아마도 풍경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지난번엔 오르막과 내리막도 적절히 있고 중간중간 마을들도 꽤 있어서 다양한 이벤트 들로 즐거웠는데, 오늘은 같은 풍경을 좌로 우로 계속 품고 걸으니, 러닝머신 위에서 걷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안 좋은 풍경을 뚫고 걸어온 것은 절대 아니다. 풍경은 분명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몇 번 봤답시고 벌써부터 지겨워하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이치겠지만, 나의 간사함을, 인간의 간사함을 이렇게나 또 한 번 확인한다.
산티아고를 넘어서, 세상의 끝이라고 불리는 피스테라까지 가볼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 사실 나는 피스테라의 존재를 까미노를 시작하기 전까진 전혀 몰랐다. 최종 목적지는 당연히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인 줄 알았는데, 그 이후에도 더 걸을 길이 있다니. 이 뿐만 아니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 가는 다른 길들도 여럿 존재한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북쪽 해안길을 따라 걷는 길도 있고, 포르투갈에서부터 걸어 올라오는 길도 있다. 다른 길들도 꽤나 궁금하다. 글쎄, 이 까미노가 끝나고 난 이후에 난 또 걸으러 오게 될까?
문득 남은 날들을 계산하고,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이게 참 덧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 얼마나 더 걸어야 마을이 나오는지도 모르겠는데, 이보다 먼 미래의 일정을 예상하고 계산한다니, 웃기기 짝이 없다.
조그마한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어깨 너머로 들었던 손님들의 대화가 생각난다.
“나는 내가 1년 뒤에 뭔갈 하겠다고, 뭔가가 되겠다고 1부터 10까지 계획을 세워서 하잖아? 근데, 그건 항상 3개월밖에 안가. 3개월쯤 되면 뭔가 항상 다른 일이 생겨. 그래서 그때 또 그걸 따라서 살다 보면, 또 다른 걸 계획하게 되고, 또 3개월이 흘러서 새로운 상황을 마주하고, 난 뭐 만날 이렇게 반복되더라고"
그 순간, 내가 세웠던 인생의 계획들이 그대로 진행되었던 게 3개월을 넘긴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게으르고, 실천력이 부족해서 3개월을 넘긴 적이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나는 어떠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난 뒤 3개월이 흘렀을 때 뭔가 새로운 상황을 마주했다. 그게 긍정적인 상황이건, 부정적인 상황이건 간에 말이다. 전역했을 때도, '이건 10년짜리 계획이다.'라고 말할 만큼 거창한 계획을 세웠으나 3개월이 지나고 보니 계획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다른 걸 하고 있었고, 복학 전에 세워뒀던 계획들 또한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공연에 갑작스레 투입되어 스스로를 갈아 넣기도 했다.
이 여행도 마찬가지다. 계획에 따르면 난 작년 9월에 이곳에 있어야 했다. 그런데 까미노의 시작점까지 육로로 이동하며 여행하는 일이 추가되면서 일정이 12월로 밀렸다. 그러다가 더 딜레이가 되어 기존의 계획보다 거의 5개월이 지난 지금, 이 까미노를 걷고 있다. 여행 중에 더 머물고 싶은 곳들도 있었고, 생각보다 볼 게 없어서 일찍 떠나버린 도시들도 있었다. 그리고 피치 못하게 긴 시간 머물러야만 했던 날들도 분명 있었다.
이 세상이 정말 내 맘대로, 내 계획대로 흘러가는 건 하나도 없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게 인생이다라는 말을 새삼 이해한다. 글쎄,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계획을 세울 수야 있겠지만, 정말 운명의 장난처럼 운명적인 무언가로 인해 계획들이 뒤엎어지는 일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다 앞날을 그린다. 그리고 그것들은 대부분 아름다운 청사진인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청사진도 그저 먼 계획의 끝에 존재할 뿐, 언젠가는 운명적인 장난으로 인해 뒤집혀 버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가 꿈꾸는 청사진이 어떤 청사진이건 간에, 그저 ‘청’하게, 푸르른 앞날이 될 수 있게, 오늘의 마음가짐을 청하게 갖는 수뿐이 없겠다.
그리고 여력이 된다면, 어차피 또 다른 일로 인해서 계획이 틀어지게 될 거, 계획을 시작하는 데에 있어서 두려움을 갖지 말고 부단히 부딪히는 것. 그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