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순례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 / Day 16 / 492.5km
힘들다.
오늘은 힘들다는 이야기, 찡찡거리는 이야기를 좀 하고 싶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그만 걷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내가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SNS에서 보이는 나의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그리고 함께하는 동행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는 잘 모르지만, 나는 충분히 강한 사람처럼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이미 꽤나 긴 시간 동안 혼자서 이 고난들을 헤쳐왔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 이 까미노에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씩씩하게 잘 걷고 있으니까 충분히 강한 사람처럼 보였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건대, 그 모든 것은 사실 ‘척'이었다.
나는 남들의 시선을 굉장히 많이 신경 쓴다. 그런 맥락으로 나는 남들에게 강한 사람처럼 보이길 원하는데, 그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나의 민망한 습관이 지금 이 상황을 만들었다. 그래, 나는 남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척'을 했고, 그러기 위해 내가 가진 체력보다 무리했다. 그래서 힘들다.
그래, 이제와 고백한다. 나는 힘들다.
강한 사람, 그래 많이 쳐줘서 평균 이상의 체력을 가진 사람 정도는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글쎄, 사실 강함의 평균이라는 것 자체가 애매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아무튼 나는 생각보다, 그리고 보기보다 평균 이하인가 보다. 아픔도 잘 참지 못할뿐더러, 금방 숨이 딸려서 헉헉 거리는 사람이다.
오늘은 32.9km가 예정되어 있던 날이었다. 그래도 30km가 넘는 일정이니까, 마음가짐을 하기 위해서였을까, 다른 때 보다 조금 일찍 눈이 떠졌다. 동행들은 아직 잠자리에 들어있는 상황이었고, 나는 침대에서 한참 동안이나 뒹굴 뒹굴 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동행들이 하나둘씩 일어나는 걸 보고, 그들과 함께 준비하고자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나는 그저 슬리퍼를 신으려고 땅을 딛었을 뿐인데, 한 발자국도 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왼발이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여기서 발을 떼면 발바닥은 땅바닥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은 채 뜯어지기만 하고, 다리만 달랑 떨어져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는 수 없이 오늘은 동행들을 먼저 보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들과 함께 아침을 먹고, 준비를 해서 함께 나서려 했는데,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천천히 가달라고 부탁하는 건 그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일 수도 있으니까. 먼저 가라는 말과 함께 인사를 덧붙였다. 혹시나 내가 너무 뒤처져서 그들의 일정을 아예 맞추지 못해서 흩어질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짧은 인사를 마치고 아침도 거른 채 나는 침대로 돌아왔다.
나는 침대에 앉아 ‘갈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가방을 챙겨 뒤늦게 숙소를 나왔다. 쉬더라도 대도시에서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가방을 숙소에 맡겨놓고 구경할 거리라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발이 아프긴 하지만 분명 숙소에만 있을 수는 없을 텐데, 슬리퍼를 신고 돌아다니더라도 조금 더 볼거리가 있는 곳에서 쉬고 싶었다. 그게 내게 주어진 시간을 알차게 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조금만 더 가면 까미노의 도시들 중에서 크기로 소문난 레온이니까, 어차피 아픈 거 더 아플 것도 없으니까. 레온까지만 일단 가보자.
이렇게까지 천천히 걸어본 건 또 처음이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절뚝거리며 걸어야 했다. 반 강제로 까미노를 음미했다. 천만다행으로, 여느 때와 똑같이 걷다 보니 아픔이 아픔을 잊게 해 줬다. 천천히 걷다 보니 생각보다 걷는 데에 큰 문제가 없었다. 글쎄, 그 당시에 발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나와 같은 생각은 아니었겠지만, 일단 걸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열심히 걸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22km 지점의 사아군에 도착해 있었다. 이 사아군은 사실 발이 너무 아프면 하룻밤 자고 갈 생각으로 봐 둔 곳이었는데, 다행히 생각보다 발이 괜찮아서 숙소가 아닌 카페를 찾았다. 그곳에서 간단한 빵과 커피를 주문하고 테라스 자리에 앉아 워커에 갇혀있던 발을 꺼내 주었다. 퉁퉁 부어오를 대로 오른발이었지만,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한결 나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중간중간 신발을 벗어서 좀 말려줄 걸, 신발 끈을 풀고 묶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아니 다른 사람들에게 약한 모습처럼 보일까 봐 그러지 않았던 게 조금 후회스럽다. 만일 그랬다면 레온까지는 아무런 무리 없이 갈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카페에선 한 신부님을 만났다. 그는 내 옆자리에 앉아 나에게 말을 걸까 말까 망설이다가 이내 내게 말을 걸어왔는데, 알고 보니 옆 마을의 신부님이라고 하셨다. 그는 까미노를 걷고 있는 나를 가엾게 여기셨는지, 대견하다고 생각하셨는지, 나의 손을 잡고 축복의 기도를 해주셨다. 글쎄, 나는 스페인어로 이루어진 그 기도문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대신에, 그의 직업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프리스트'라는 단어에 꽂혀 있었던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내가 알아들은 단어가 ‘프리스트'뿐이었을 수도 있다.)
게임을 자주 하진 않았지만 게임 속 프리스트라는 직업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알고 있다. 프리스트는 게임 속 플레이어들이 그룹을 이뤄 몬스터 사냥을 할 때, 다른 그룹원들의 체력을 채워주거나 방어력을 높여주는 버프 스킬을 사용하는 사람이다. 또 프리스트는 언데드 속성의 몬스터에게 강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프리스트의 성스러움이 악마와 다를 바 없는 언데드들에게 치명타를 입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내 꼴이 언데드와 다를 게 없다. 정말 좀비처럼 걷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는 언데드가 아닌 사람이긴 사람이었나 보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데미지로 쌓이는 것이 아니라, 되려 나의 체력을 채워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 말이다.
글쎄, 발을 말렸기 때문일까, 신부님의 축복기도 때문이었을까, 남은 10km의 일정도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카페를 나와 조금 걷기 시작하려는데 이번엔 오른발에 문제가 생겼다. 통증은 크게 없었지만 발바닥에 있던 물집이 더 넓은 범위로 커지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렇다고 중간에 머물만한 곳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어쩔 수 없었다. 신부님의 축복을 등에 업고, 예정대로 10km를 마저 걸어 동행들과 약속했던 Bercianos del real Camino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까미노)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그러나 숙소에는 이미 와 있어야 할 그들이 없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숙소의 와이파이를 연결해 그들에게 연락하니, 계속해서 나를 기다리며 천천히 걷다가 본인들도 지쳐 버리는 바람에 사아군에 멈췄다고 했다. 아뿔싸, 내가 사아군에 멈췄다면 그들을 만날 수 있었을 텐데, 프리스트의 힐 덕분에 10km를 더 갈 수 있었던 내가 되려 그들보다 앞서 있게 된 것이다. 앞서거나 뒤서거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이제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이런 발을 가지고도 이만큼이나 걸었다는 스스로가 만족스러웠다.
대신 숙소에는 다른 한국인들이 있었다. 우리보다 하루 앞선 일정으로 까미노를 걷던 분들이셨는데,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정말 순례의 마음으로 까미노를 걷고 계신 형님들이었다. 그들에게 까미노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도 많이 듣고, 얼큰한 고추장찌개도 얻어먹으며 또 다른 따뜻함을 마주했다. 냄비밥을 짓느라 눌어붙은 누룽지에 물을 부어서 따스운 숭늉을 만들어 먹기도 했는데, 그 맛을 아직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발은 문제가 심각했다. 숙소에 도착해서 문제였던 오른발을 확인해보니 예상대로 물집은 커질 대로 커져 물집이 아닌 물주머니가 되어 있었다. 정말 엄청난 크기였다. 발을 흔들면 물집 안에 있는 물이 찰랑거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의학적으로 어떤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물집이 발을 보호하기 위해서 생기는 것이라 생각했다. 상처 난 곳에 딱지가 생기는 이유도, 상처가 더 커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것처럼 물집도 그런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왔다. 그렇게 물집을 계속 방치해뒀던 것인데, 이제는 조치가 필요했다. 점점 더 넓어져서 나를 괴롭히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오른발의 물집, 아니 물주머니를 바늘로 구멍을 내고 내부에 차 있던 물을 제거했다. 물집 자체를 제거하려고 그 넓은 살을 다 잘라내면 아예 걷지도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들었기 때문에, 그 방법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왼쪽 발의 물집들은 상황이 달랐다. 이미 한참이나 물집을 방치한 탓에 물집이 터지고 그 안에 새로운 물집이 생기고 있는 상태였는데, 이미 터져버린 살갗들이 되려 물집의 상태를 악화시키는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왼발의 물집들은 살갗을 제거하는 쪽으로 조치를 취했는데, 예상대로 안 쪽 살들은 너무나도 약한 속살들이었다. 약을 바르고 메디폼도 붙였지만, 내일 아침 얼마나 괜찮아질지 모르겠다. 레온까지는 가야 하는데... 디딜 수나 있으려나....
정신건강은 90%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10%를 뺀 이유는 아침마다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는 점, 그리고 점점 택시 버스 같은 탈 것에 대한 광고들이 눈에 들어오고, 그 유혹에 미약하게나마 흔들린다는 점 때문이다. 게다가 도대체 내가 무슨 덕을 보자고 고집스럽게 걷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종종 들기 때문에 10%를 뺐다. 그러나 몸 건강은, 그래 많이 쳐서 50% 정도 되는 것 같다. 손과 발을 제외하곤 큰 문제가 없으니, 0점은 아니다. 물론 손과 발이 제일 큰 부분을 차지하긴 하지만 말이다. 손등에 생긴 햇빛 알레르기는 점점 낫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용의 피부처럼 보기 흉한 상태다. 그리고 발은 위에서 말했듯이 물집을 너머 물주머니를 여러 개 달고 다니는 꼴과 다름없다. 뼈나 인대, 그리모 무릎 같은 관절류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그놈의 햇빛 알레르기, 그놈의 물집이 문제다.
이제 절반 했으니, 그래, 절반을 조금 편하게 걸었으니 나머지는 참아내는 여정이 되려고 하는 걸까?
이제 진짜, 진짜 까미노가 시작되는 건가?
그래 여태는 너무 편해서 잡생각이 많았나 보다. 그리고 그 때문에 스스로의 내면을 돌아볼 시간이 없었나 보다.
이제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넣고, 그를 통한 성취감을 느끼려고 하나보다.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넣어, 그 상황을 헤쳐나가는 것을 통해 스스로를 마주하려고 하나 보다.
단단한 겉껍질을 벗기고 속을 들여다보는 일이 이렇게나 어렵다니.
고통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