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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호 Mar 23. 2022

굳이 다른 이유

스페인 순례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 / Day 18 / 553km

오늘의 루트


    여행 속 여행일까, 여행 속 도전일까.

    도전 속 여행일까. 도전 속 도전일까.

    아마 전부겠지.


    레온에서 최대한 가까운 , 아르카우에하에서 머물기를 잘했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레온으로, 그것도 천천히 걸었는데도 11시가 되지 않았다. 미리 정해 두었던(선택지도 많이 없었지만)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다시 동행들을 만날 때까지 혼자서 레온을 구경했다. 레온은 워낙  도시니까 볼거리가  많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다를  없었다. 그저 지난 여행들과 똑같이 정처 없이 걸었을 뿐이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발바닥이 조금 아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레온을 둘러본다는 , 여행  도전인지, 도전  여행을 하고 있는 건지, 괜히 느낌이 아이러니하다.

    레온에서 하루 쉬었다가 갈까 고민 중이다. 스스로를 돈은 없지만, 시간은 참 많은 여행자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샌가 너무 시간에 쫓기는 사람처럼 여행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 아쉬움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하루 쉰다고 해서 뭐가 또 달라지나 싶은 생각도 든다. 한 달을 멈췄다 가는 것도 아니고 고작 하루가 다른 느낌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레온에 하루 더 머물고 싶은 이유는 고작해야 일어나고 싶을 때까지 침대에 누워있기 위해서, 걷지 않기 위해서, 맥도날드에 가기 위해서 이게 전부다. 그런데, 정말 말 그대로 고작 이런 것 때문에 굳이? 글쎄, 방금 이야기한 것들이 분명 내가 좋아하는 것들인데, 여기에 괜스레 ‘굳이?’를 붙여서 고민을 만들어 또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다. 아마 내일까지도 이런 마음이겠지.


This is Leon!


    내가 바라는 건 정녕 뭘까?


    다니다가 열려있는 성당이 있으면 나는 꼭 들어가 보는 편이다. 내가 신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신적인 존재들에게 소원을 비는 경우들은 더러 있기 때문이다. 신적인 존재라고 뭐 별건 아니다. 부처님, 예수님, 성모 마리아님뿐만 아니라 달에게 빌 때도 있고, 뿌옇게 낀 안개에게 빌 때도 있다. 그러니 성당이 많은 이 유럽에서는 꼭 성당이 보이면 들어가 보는 것이다.

    늘 비는 소원의 내용은 정해져 있다. 예전엔 항상 세 가지를 빌었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늘 소원이 빌 일이 있으면 똑같은 세 가지를 빌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내가 연기를 조금 더 잘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사랑하는 사람과 조금 더 좋은 관계로 발전해 나가게 해 주세요.’ 딱 이렇게 세가지만 반복해서 빌었다. 자꾸 빌면 빌수록 이루어질 것 같아서 말이다.


레온 대성당과 나


    그러나 이제는 내가 연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니니, 뒤의 두 가지는 필요가 없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요새는 첫 번째 소원에 덧붙여 내용을 바꿔서, ‘내가 좋아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리고 그 선택이 최선이라고 믿는 힘을 주세요.’ 이렇게 바뀌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해서  여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여행의 모토대로, 내가 좋아하는 대로,  좋을 대로 계속 선택을 하긴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좋아하는지는 아직도 도통 모르겠다. 심지어, 내일 레온에서 쉬는 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인지,  가는 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으니 말이다. 결국에 내가 좋아하는 대로 선택을 하기야 하겠지만,  선택을 확신할 것이라는 자신은 없다. 그러니 내가 내린 선택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을  있는 힘이 필요하다.  선택하건 간에 ‘이게 최선이다.’라고 생각하면, 내가 내린 결정에 실망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아주 안 좋은 습관이다.


    오르페우스는 하데스의 지옥을 빠져나오다가, 뒤돌아보지 말라는 하데스의 경고를 무시한 채 에우리디케를 돌아보는 순간, 사랑하는 그녀를 잃게 되었다.


    이게 지금 내 꼴이다. 나는 스스로를 자꾸만 의심한다. 나의 선택을 의심한다. 좋아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선택해 놓고선 ‘내가 정말 이걸 좋아하나?’하며 계속해서 의심을 품는다. 그런 의심들에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한다. 모두가 그럴 것이다. 사실 그런 의심을 물리칠만한 확신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하면 결국엔 ‘아, 그래 난 이걸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가 되어버리고 만다. 오르페우스처럼 ‘내가 정말 좋아하나?’하며 뒤돌아보니, 내가 좋아하던 것 에우리디케가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 이게 좋아. 이걸 고를래'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들이 참 부럽다.

    글쎄, 좋아하는 것에 이유를 붙이고, 확신을 찾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닐 거라고 믿는다. 좋아하는 일에 확신이 더해지면 분명히 더 큰 시너지를 만들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좋다는데 자꾸 이유를 붙여야 할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든다. 좋으면 좋은 거지,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렇게 좋은 거에 굳이 이유를 붙일 필요가 있나?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좋아하면 그냥 좋아하는 걸로,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걸로 끝났으면 좋겠다.


레온 시내를 걷다가 찾은 가우디의 건축물

    시내를 조금 돌아보고 있으니, 하나둘씩 동행들이 돌아왔다. 처음엔 욱희와 지영이 형님, 그리고 형석이까지 모두가 레온에 모였다. 사실 형석이는 욱희와 지영이 형님이 레온에 도착한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도착했는데, 알고 보니 나도 모르는 새에 욱희와 지영이 형님과 떨어져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한참 뒤에 떨어져 있었는데, 우리의 삼겹살 파티가 그를 재촉했다.

    나는 아직 내일의 일정을 결정하지 못했지만, 욱희는 레온에서 하루를 더 머물기로 했고, 일정이 촉박한 지영이 형님은 내일 바로 출발하시겠다고 했다. 그러니 어쩌면 이번 레온에서의 만남이 우리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삼겹살 파티를 계획했다. 마트에서 삼겹살을 사고, 한인마트에서 소주까지 살 것이라는 계획을 뒤따라 오고 있는 형석이에게 얘기하니 그는 무려 40km를 달리듯 걸어왔다. 글쎄, 고기 냄새가 그를 유혹한 것일까, 달콤한 소주 냄새가 그를 유혹한 것일까. 아무튼 그 덕에, 여태까지 함께했던 모든 이들과 즐거운 저녁식사를 했다.


소고기 하몽이라니 / 처음처럼, 삼겹살, 짜파게티, 그리고 김치


    모처럼 마시는 소주 때문에, 금세 취기가 감돈다.

    취기가 감도는 만큼, 나의 고민은 더욱 짙어지고.


    그래서 성호야, 내일은 쉬는 게 좋겠니 가는 게 좋겠니?

    어떤 게 네가 좋아하는 일이니?


    어떤 결정을 하건, 넌 그걸 좋아해서 결정한 것이니 굳이 다른 이유는 찾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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