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순례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 / Day 17 / 530.9km
일행들과는 Leon(레온) 즈음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겠지.
하루에 적어도 20km, 많으면 30km씩 걷는 게, 나름 일과가 되기는 했나 보다. 아침에 일어나면 대충 아침을 챙겨 먹고, 준비해서 걷고, 도착하면 씻으면서 빨래하고, 저녁거리를 장 봐서 밥 먹고. 매일매일이 똑같다. 발이 아프다고 계속 찡찡거리긴 했지만, 발도 나름 적응을 했는지, 걸어야 하는 시간이 되면, 그리고 걷기 시작하면 언제 발이 아팠냐는 듯 아주 씩씩하게 걷는다. 이렇게 걷기가 나의 일상이 되었다.
그저께, 그리고 어제, 오늘까지 3일 연속으로 30km 이상씩을 걸었다. 다음 대도시인 레온에서 시간을 좀 더 여유롭게 쓰고 싶다는 생각으로, 조금 더 레온과 가까운 곳에서 머물 수 있게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레온에서 6.5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Arcahueja(아르카우에하)라는 마을에 머물고 있지만, 사실 30km 이상씩 매일 같이 걷는 건 조금 무리가 있기는 하다. 그래서 그제 어제 발이 많이 아프기도 했고 말이다. 이제 레온이 코 앞이니, 레온을 즐기며 조금 쉴 수 있기를 바라는 바다.
부르고스 이후에서 부터인지, 풍경의 변화가 크게 없다. 매일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걷고 있다. 지난번 난생처음 보는 지평선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게 무색할 만큼, 계속해서 지평선을 바라보며 걷고 있다. 여행을 하는 즐거움 중에 하나는 못 보던 풍경을 보는 것인데, 계속해서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제는 풍경에 대한 기대가 덜해졌다. 그러다 보니 어느샌가부터 땅을 보며 걷는 시간이 많아진 기분이다. 그런 데다가 매일 같이 30km씩 걸어대고 있으니, 걷는 일도 지겨우니 계속해서 고개를 숙인 채 걷는다.
‘언제쯤 도착하려나’
나는 내가 얼마큼 걸었는지, 지금 어디쯤 왔는지를 알아버리면, 지쳐버릴 것 같아서 웬만하면 GPS지도를 보지 않고 걸으려고 하고 있다. 그렇게 계속해서 지금이 몇 시쯤 인지도 잊은 채 땅만 보고 걷다가, 고개를 확 들었을 때, 목표했던 마을이 짜잔~ 하고 있었으면 생각을 걷는 내내 하고 있다.
땅만 보고 걸으니 문득, 괜스레 놓치는 것들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조금 천천히 걸으면서, 중간중간 마을을 들러 구경도 하고, 다양한 영감들을 찾는 게 더 좋겠다는 후회가 조금 남는다. 사실 빨리 걷는다고 누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이렇게 레온에서의 시간에 집착하여, 현재를 저당 잡힌 채 걷고 있는 것일까. 이미 걸어온 길, 후회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은, 문득 아쉬움이 사무친다.
겨울철 까미노의 장점은 덥지 않다는 것, 숙소에 사람이 붐비지 않는다는 점 등을 들 수 있겠다. 하지만 크나큰 단점은 문을 닫은 알베르게가 많아서 일정 조율이 유연하지 않다는 점이다. 나는 지금 이게 제일 아쉽다. 매일매일 어떤 알베르게가 오픈을 했는지 먼저 확인하고, 그 마을까지 ‘무조건'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목표치를 정해 걷고 있다. 한 번쯤은 발길이 닿는 데까지 가보고, 쉬고 싶은 데서 그냥 무작정 쉬기도 해보고 싶은데, 이런 걸 할 수가 없으니 그게 너무 아쉽다.
오늘도 그 때문에 벌어진 한 가지 사건이 있다.
이야기했던 바와 같이 나의 오늘 목표는 아르카우에하였다. 겨울철에 오픈한 알베르게들을 정리해서 알려주는 웹사이트를 통해 얻은 정보에 의하면 다음 마을로는 아르카우에하가 가장 적절해 보였기 때문이다. 비록 36km를 걸어야 한다는 힘듦이 있긴 했지만, 큰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갈 수 있는 거리였고, 무엇보다 레온과 가장 가까운 마을 중 문을 연 마을이 이곳뿐이었기에,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렇게 무려 7시간 30분을 걸려서, 중간에 멈추고 싶은 마음을 꾹꾹 참아가면서 (쉬고 싶다고 하더라도 쉴 수 있는 알베르게는 없었지만) 마을에 도착했는데, 아뿔싸, 알베르게의 문이 닫혀 있었다. 문을 두들겨도 나오는 사람이 없었고, 한참을 기다려도 지나가는 사람조차 없었다. 국제전화는 최대한 지양하고 싶었는데, 하는 수 없이 남겨져 있는 전화번호에 연락을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 알베르게 안 열었나요?’
‘노, 원 모멘토’
아, 열었냐고 물어볼걸. 순간 영어의 예스/노 문법이 떠올랐다. 열지 않았냐는 질문에 ‘노'라고 답했으니, 이건 닫은 거 아닌가? ‘안 배고파?’라는 물음에 ‘응'은 배가 고프지 않다는 뜻, ‘아니'는 배가 고프다는 뜻이 통하는 것은 한국뿐이고, 영어에선 예스는 무조건 긍정, 노는 무조건 부정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연걸까 안 연걸까? 남 눈치를 많이 보는 성격상, 다시 전화를 해 보기는 부끄럽고, 혼자서 별에 별 생각을 다했다. 그러나, 원 모멘토라는 대답에 어울리지 않게끔 또 한참을 기다리는 상황이 발생하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시 전화해봐야지.
‘오늘 알베르게 열었나요?’ (이번엔 긍정문으로 물어봤다)
‘예스’
‘아, 오는데 얼마나 걸리시나요?’
‘써티 미닛’
그래 차라리 이게 나았다. 긍정문으로 묻고, 얼마나 걸리는 시간까지 확인했으니 이젠 맘 편히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도 통화를 했던 알베르게의 주인 어르신은 나타나질 않으셨다. 걸을 땐 괜찮았는데, 가만히 있으니 땀이 식으면서 점점 추워 오기도 했고, 해도 지고 있는 상황이라 결국 여기서 더 이상 기다릴 순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더 늦기 전에 6km를 걸어 레온까지 가야겠다. 지금 출발하면 그래도 해가 떨어지긴 도착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풀어두었던 신발끈을 다시 묶었다. 신발끈을 묶으며 ‘머피의 법칙처럼 이럴 때 꼭 나타나던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신발 한쪽을 다 묶기도 전에 주인 어르신이 나타났다.
여전히 덮을 이불은 없지만 라디에이터도 있고, 히터도 있어서 따뜻했다. 그리고 혼자 머물게 될 줄 알았는데, 걸으며 자주 마주치던 알바니아 친구와, 루마니아 친구 또한 함께 방을 쓰게 됐다. 그들과 알베르게에 딸려있는 식당에서 순례자 메뉴를 나눠먹으며, 나름 안락한 저녁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오늘, 그리고 내일, 레온까지 좀 쉰다는 생각으로 조금 천천히 돌아다니면 딱 좋겠다.
지금은 레알 마드리드의 열성팬인 알베르게 아저씨와 맥주를 마시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리버풀의 챔스 경기를 보고 있다. 아니, 아저씨는 레알 마드리드 팬이고, 나는 바르셀로나 팬인데, 왜 둘이 앉아서 오붓하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리버풀 경기를 보고 있는 거지?
아무튼, 바르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