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산후조리를 준비하며 들어지는 옛날 기억들
뚝배기에 담긴 미역국, 그 정성스러운 맛의 깊이
첫아이는 딸이었다.
시부모님에게는 처음 맞는 손주였다.
본인 결혼식보다 아들의 결혼식에 더 설레셨다는 시어머니는 나의 첫 출산에도 흥분하셨다.
친정엄마가 돌아가시고 안 계셔서 산후조리를 해줄 사람이 없자 시어머니는 당연히 자신이 며느리의 산간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초보 부부가 아무 연고도 없는 지방에서 살고 있는데 출산을 둘이 알아서 하라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때 시댁엔 시부모님과 시할머니까지 계셨는데 그분들에게 나의 출산은 가족의 큰 행사나 다름없었다. 임신 초기부터 말기까지 심한 입덧과 다양한 임신 증후군을 겪고 있는 나를 아들에게만 맡겨둘 수는 없었던가보다. 그것이 임신한 며느리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아들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출산 한 달 전부터 서울 시댁에 올라와 지내고 있었다.
드디어 출산일. 무지막지한 진통 끝에 나는 딸을 낳았다.
사실 첫 국밥은 병원에서 먹었다. 새벽에 아기를 낳고 얼마쯤의 시간이 지나자 미역국에 밥이 나왔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미역국의 맛은 어땠는지 전혀 기억에 없는데 먹었을 때의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왜냐고?
그걸 무슨 느낌이라고 설명해야 할지...
밥을 말은 미역국을 한입 떠서 삼키는데 마치 빈 자루에 한숟가락씩 밥이 투두둑하고 떨어지는 느낌이랄까?
하여튼 미역국밥을 퍼넣는 내 배속은 마치 아기가 빠져나간 텅 빈 푸대자루 같았다.
진짜 미역국 같은 미역국은 시댁에서 조리를 받으면서 먹었다.
시어머니는 무슨 고기를 사서 어떻게 조리를 하셨는지 몰라도 부드러운 고기 덩어리와 미역이 빡빡하게 들어있는 미역국을 매번 뚝배기에 퍼서 주셨다. 아마도 나를 위해 새로 장만한듯한 뚝배기였다.
밥상위에서 김이 설설 나던 뚝배기는 내가 미역국을 다 먹을 때까지 따뜻한 온기를 담고 있었다.
나는 삼시세끼 미역국을 잘도 먹었는데 어머니는 내가 질리지도 않고 잘 먹는다고 흐뭇해하셨다.
그때 먹은 미역국은 내 평생 가장 맛있는 미역국이었다.
시어머니 치매 걸리시기 전 무슨 고기로 어떻게 미역국을 끓였었는지 물어보지 못한 게 많이 아쉽다.
삼칠일마다 아기를 위해 빌어주신 시할머니
시부모에게 첫 손주인 딸은 시할머니에게도 첫 증손주였다. 시할머니는 그런 증손주를 위해 특별히 무병장수를 빌어주고 싶어하셨다. 그렇게 준비된 작은 떡시루.
아이가 태어나고 첫 칠일째 아침이 되자 시할머니와 시어머니는 내방으로 들어와 누워있는 나와 아기의 머리맡에 작은 떡시루를 놓아두셨다. 아마도 이른 새벽부터 떡을 앉히고 쪄던가보다. 앙증맞게 작은 시루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팥시루떡이 담겨있었다. 부스스 몸을 일으키는 나를 옆에 앉혀두고 시할머니는 아기 머리맡에 앉아 두 손바닥을 비비며 삼신할머니께 아기의 무병장수를 빌었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언사 없는'(말재주 없다고 스스로 하시던 말씀) 할머니가 얼마나 찰지게 "우리 아기 아프지 않고 무럭무럭 잘 자라게 해 주시고.."를 반복하며 정성스럽게 빌어주셨는지를...
나는 내 딸이 큰 병 없이 잘 자라준 것도, 이번 임신동안 별 입덧도 없이 잘 견뎌준 것도 증조할머니가 지성으로 삼신할미에게 빌어준 덕택이라 믿는다.
시어머니 대신 산후조리를 해준 성당 언니들
아무 경험이 없어 서울 시댁에서 첫애를 낳았던 때 하고는 달리 둘째는 나와 남편 그리고 첫째가 있는 '우리 집'에서 산후조리를 하기로 했다.
시댁에서의 산후조리가 불편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아무리 미역국이 감동적이고 맛있어도 내 집에서 편하게 조리를 하는 것이 마음 편할 것 같았다. 그렇게 둘째를 울산에서 낳겠다고 하자 시어머니가 흔쾌히 내려와 도와주시겠다고 했다. 하지만 풀타임 일을 하던 시어머니가 두어주 동안이나 며느리 산간을 해주리라 기대한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출산일에 맞춰 내려오신 어머니는 딱 일주일을 채우고 그만 서울로 올라가 버렸다. 이유는 한여름의 울산이, 우리 집이 너무 더워서 견디기 힘들다는 거였다. 그때까지 시아버지와 함께 비즈니스를 꾸려가셨던 바쁜 분이었기에 이해는 해야 했지만 출산 후 겨우 일주일 지나 줄행랑을 놓으신 시어머니에게 화가 났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적인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당장 내 몸 추스르랴, 빽빽 우는 아기 돌보랴 정신이 없었다.
그때 짜잔~ 하고 나타난 구세주들이 있었다.
바로 내가 나가던 성당 자매님들이었다. 그들은 출산 일주일만에 혼자서 신생아와 씨름을 하고있는 내게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 게다가 두서너 살씩 많은 언니들인 그분들 중 두 분이나 대학병원 간호사 출신들이었다. 산모와 신생아 돌봄에 프로인 그들은 매일 교대로 우리 집에 찾아와 나의 점심도 챙겨주고 아기 목욕을 도와주었다. 아기를 씻겨야할 시간에 짠 하고 나타나던 그 언니들이 얼마나 고맙던지....
그들은 실제적인 도움뿐이 아니라 육아의 선배로서, 같은 여성으로서 출산과 육아의 어려움과 고충을 서로 나누고 위로하는 나의 진정한 서포트 그룹이었다.
그때의 고마운 마음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나는 한국 갈 때마다 그분들과 반가운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딸의 출산을 기다리며
떠들썩한 베이비 샤워 대신 딸은 필요한 아기 용품을 알려주며 한두 가지 선물해 달라 했다. 시어머니는 비싼 유모차를 사주었고 우리는 요람과 신생아 용품을 사주었다. 딸이나 사위 모두 '준비'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성격들이라 어련히 알아서 준비하겠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출산이 임박하니 저희들끼리 준비한 출산준비가 어쩐지 미흡해 보인다. 친정엄마인 내 생각에 그렇다는 거다.
무엇보다 신생아용 기저귀를 나는 천으로 했으면 싶은데 딸은 이미 종이 기저귀를 사놓았단다. 며칠 전 소창을 이야기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천 기저귀 세탁까지는 할 수가 없단다. 나는 할머니이고 딸은 엄마이니 엄마말대로 해야겠지만 영 아쉽다.
딸은 걱정하지 말라하지만 저 낳을 때를 생각하며 곰곰 되짚어보니 준비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미역 준비해야지, 고기와 해물 준비해야지, 산모 영양식 준비해야 하니 재료와 양념 준비해야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준비할 품목이 늘어난다. 장 보러 갈 때마다 딸을 생각하며 뭐 살 것이 없는지 살펴보고 사두고 있다.
그러다가 엊그제는 '뚝배기'도 하나 샀다. 내가 시어머니에게 받아먹던 뚝배기 미역국처럼 나도 뚝배기에 국을 담아 뜨끈뜨끈하게 먹일 심산이다. 뚝배기래야 한국에서 살 수 있는 고급진 것은 아니고 식당용의 투박한 것이지만 내가 장만한 미역과 쇠고기를 듬뿍 넣고 푹푹 끓여 담아내면 내가 감동하며 먹었던 시어머니 미역국 같은 맛을 내지 않을까 싶다.
문득 내가 괜스레 마음이 바빠지고 딸의 전화에 깜짝 깜짝 놀라는 내 모습에 싱거운 웃음이 난다.
아마도 모든 친정엄마들의 마음이 이렇겠구나싶다. 새로운 경험이다.
무엇보다 나는 딸이 아기를 낳도록 오래 살아서 이렇게 손녀의 출생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아기 낳는 딸에게 친정엄마로 곁에 있어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가슴은 부풀어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