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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하바 Mar 25. 2021

곁다리 이방인, 2년 (프롤로그)

미국에서 학생비자 배우자 자격으로 살아간다는 것


처음이자 처음이 아니었다. 짧지만 세 번의 외국 생활이 있었기에 처음은 아니었다. 보증인인 남편이 없으면 소위 "시체 비자"라 불리는 곁다리로 하는 외국 생활은 처음이지만. 곁다리 이방인인 주제에 나에게 딸린 곁다리까지 하나 더 있었다. 이제 갓 만 두 돌을 넘긴, 절대적으로 엄마가 필요한 아이. 나는 처음이 아닌 외국 생활인데, 남편은 여행이 아닌 살아보는 경험은 또 처음이다. 내가 더 잘할 수 있고,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는데 나는 나설 수 없다. 출산 후 2년. 모든 생활의 중심이 아이가 되고 새로운 관계 역시 내가 아닌 아이를 앞세워 맺던 나는 미국 생활 2년이 더해지며 자연스럽게 남편 뒤로, 아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 당연해졌다. 


인정한다. 상황이 나를 곁다리로 만든 것이 아니라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는 걸. 아닌 척 잘 감추고 있었지만 늘 그랬다. 한 번도 "최선"을 다 해 본 적이 없고, "적당히 잘"을 선택하며 살아왔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런저런 핑계를 갖다 붙이며 진짜 원하는 것, 더 중요한 것 대신 타협점을 찾아 합리화했다. 돌이켜보면 참 비겁한 겁쟁이. 그런 주제에 자기 포장은 잘하는 모순된 인간.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나는 그랬다. 미국에서의 곁다리 2년 삶은 그러니 나에게 잘 맞았다. 처음에는 답답했고, 분노했고, 허탈했다. 내가 나로 설 수 없었으니까. 곧 타협했고, 슬쩍 뒤로 물러나 책임은 지지 않는데 익숙해졌고 편리함을 알았다. 지금껏 그래 왔듯 곁다리로 적당히 잘 살아가는 걸 선택한 것이다.




딸 부잣집 네 딸 중 장녀였던 나는 대부분의 서사가 그러하듯 빨리 독립해 동생들 도와야 한다는 부모님의 기대를 업고 자랐다. 다행히 운도 실력도 제법 괜찮았다. 쉽게 특목고에 입학했고, 수능 점수는 평소보다 더 잘 나왔다. 더 힘들기 싫다고 멋대로 특차 지원을 했고 학교에서 가장 먼저 합격 소식을 받았다. 대학 첫 학기 성적은 과탑. 하고 싶은 것도 잘하는 것도 딱히 없었기에 배우고, 외우는 것만 성실하게 했던 책임감 많은 아이에게 거기까지는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결혼 전까지 중국과, 필리핀과 영국 세 번의 외국 생활을 했다. 이렇게만 쓰면 몹시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은 중학생 때부터 아킬레스건이었던 영어에, 돈에 굴복해 한 선택들. 심지어 앞 서 두 번의 외국 생활은 결과도 나름 만족스러웠던 데 비해 마지막은 어찌 보면 도피이기도 했다. 결과야 어쨌든 앞 선 세 번의 타향살이는 스스로 한 선택이었다. 외국 생활을 결심하고, 장소와 학교를 정하고, 기간을 정하고, 가서 살 곳을 정하고 필요한 돈을 모으는 것 모두를 혼자서 해냈다. 결과에 대한 책임이 있으니 누구보다 열심히 배웠고, 그럼에도 또 열심히 즐기고 현지인들 속에 어우러지기 위해 노력했다. 


미국에서의 곁다리 생활은 시작부터 달랐다. 


입학을 위한 성적을 받아내는 것도, 갈 수 있는 학교도, 심지어 이사업체마저도 내 선택인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의 손길이 필요했다. 남편이 어학 성적을 만드는 1년 동안 평일에도 주말에도 나는 아이와 단 둘이서 부대꼈다. 지원에 필요한 서류들을 대신 떼어주고 레쥬메를 같이 손봐주었다. 정해진 이사업체들에 전화해 상담하고 견적을 내는 일도 내 몫이었다. 중간과정은 내 몫인데 결정은 항상 남편 손을 거쳐야만 하는 일들. 빠르고 정확한 의사결정이 내려지지 않음이 불편했고, 직접 컨트롤할 수 없는 모든 일들에 마음은 지쳐갔다. 그래도 어찌어찌 우리 세 가족은 모두 태어나 처음으로 뉴욕 땅을 함께 밟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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