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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하바 Mar 26. 2021

나 대한민국에 면허 있는 사람인데

세계 초강대국의 민낯을 엿보다



곁다리 미국 생활 중 최악의 경험을 고르라면 두 번 고민할 것도 없이 MVC(Motor Vehicle Commission)와 얽힌 기억들을 꼽는다. MVC는 한국으로 따지자면 운전면허시험장과 교통안전공단이 합해진 개념의 공기관인데, 미국인들도 웬만하면 방문하기 싫어하는 곳이다. 고압적인 직원들의 태도는 차치하고 더 이상 비효율적일 수 없는 업무 처리 과정에 시달리다 보면, 세계 최강대국이라는 미국에 대한 기대가 무참히 꺾일 수 있으니 주의할 것. 우리는 2017년에서 19년까지 미국 뉴저지에 거주했다. 미국 운전면허 발급 절차나 필요서류는 주에 따라 다르고 또 내가 체류했던 기간과는 변동이 있을 것이므로 구체적인 부분은 추가 확인을 권유한다. 


거대한 땅덩어리를 가진 미국에서 생활하는데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이동을 위한 운전은 필수조건이다. F비자나 J 비자, 즉 학생비자나 문화교류 비자 등 비이민 비자로 미국에 체류할 경우 운전을 하기 위해서는 미국에서 인정하는 운전면허증이 필요하다. 미국 주정부에서 인정하는 운전면허증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국제면허증 다른 하나는 체류하는 주에서 직접 발급받은 미국 면허증이다. 짧은 여행이라면 국제면허증만으로도 충분하지만 - 운이 나쁠 경우 국제면허증이 있어도 한국 면허증과 공증 서류, 여권이 필요할 수 있으니 항시 소지할 것 - 장기 체류 시 특히 F2(학생 배우자 비자) 비자는 신분 증명을 위해서도 미국 운전면허증 발급이 필수다. 주에 따라 다르지만 한국 면허증이 있는 경우 별도의 시험 절차 없이 바로 미국 면허증을 발급해 주기도 하고, 실기시험을 면제해 주기도 하는 등의 혜택이 있다. 그렇다면 미국 면허 발급이 뭐가 어렵냐고?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동반 비자이기 때문. 미국 내에서 나의 신분은 본 다리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곁다리라 매 방문마다 남편을 동반해야 한다.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저렇게 간단한 절차인데 왜 "매" 방문이라고 표현했는지. 일단 모든 비이민 비자 소지자는 매 년 운전면허를 갱신해야 한다. 우리야 2년 체류였지만, 학생비자로 석박사 과정을 밟는 지인들은 MVC 방문을 연례행사로 8년, 9년 까지도 하고 있었다. 


1년에 한 번 정도는 괜찮지 않으냐고? F2나 J2 동반비자 소지자는 한 번에 면허를 발급받거나 갱신할 수 없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단 한 번에 성공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단순 연장일 뿐일 때도. 처음 미국에서 운전을 하기 위해 뉴저지 주 면허증을 발급받는데만 나는 세 곳의 다른 MVC에 도합 여섯 번을 방문해야만 했다. 우리보다 먼저 미국에 자리 잡은 지인들 중에서는 내가 최악의 케이스였는데, 블로그에 나의 경험을 포스팅한 후 50여 개가 넘는 댓글들이 달린 걸 보면 뉴저지 주에서만큼은 비이민 비자 소지자에 대한 운전면허증 발급 요건이 강화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동반비자 소지자가 가장 흔하게 겪는 문제는 미국 이민국 시스템(SAVE)에서 내 신원 정보가 조회되지 않는 경우다. 입국 직후라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 시스템상 처리가 늦어질 수도 있고, 오류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뉴저지에 6년째 거주 중인 친구는 거의 매 년 같은 문제를 겪다 보니 이제는 당연히 첫 방문에 면허 갱신이 가능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했다. 


일단 SAVE 시스템 조회라도 하려면 창구 직원을 만나야 하는데 이 과정도 결코 쉽지 않다. 보통은 MVC 밖까지 항상 길게 늘어선 줄 끝에 가서 서는 게 첫 단계. 총을 든 경비원이 지키고 있는 MVC 내부로 들어가면 방문 용건을 확인하고 면허 발급에 필요한 서류들을 1차로 접수창구 직원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이때 6 Points of ID (적합하게 미국에 체류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신원확인서류들) 점수를 충족해야만 운전면허 발급 창구 직원을 만나 SAVE 시스템 조회도 하고 발급 신청 서류 접수도 할 수 있다. 접수창구에서 통과한 6 포인트 서류들을 운전면허 발급 창구 직원이 매의 눈으로 다시 검사를 한다. 


또다시 곁다리의 서러움. 분명 남편과 꼭 같은 서류를 준비해 갔는데 나만 포인트가 모자란단다. 시스템상 신원이 확인되지 않아 재방문을 했기에 서류 접수 담당 직원이 달라서였을까? 공식 발급받은 서류의 인정 여부가 직원에 따라 달라진다니 역시 이해할 수 없다. 아예 다른 지역의 MVC를 찾았다. 다시 위의 과정을 거쳐 같은 서류를 제출했고 그대로 통과다. 허허. 


운전이 선택이 아닌 필수인 나라. Social Security Number (우리나라의 주민등록번호와 비슷한 역할)를 발급받지 못하는 비이민 비자 소지자들이 여권 대신 가질 수 있는 공적 신분 증빙 수단인 운전면허증. 운전면허증 발급 절차와 조건은 당연히 까다로워야만 한다. 지역에 따라, 직원에 따라 달라지는 까다로움이 아닌 공정한 기준과 절차의 까다로움. 


출국 직전 면허증을 갱신해서 간 남편은 필기로만 뉴저지주 면허증을 발급받았다. 내 블로그 댓글 중 한 분은 한국 면허증이 갱신 후 발급받은 지 1년 이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발급받은 지 6년이 넘어가는 내 운전면허증은 거절당했다. 


갱신 기간이 1년으로 너무 길게 책정되어 있다는 이유로(대한민국 법에서 정한 기간이다). 뒷 면에 주소 변경 스티커가 붙어 있다는 이유로(대한민국 정부 기관 직원이 직접 붙여 준 스티커다). 시스템에서 한국 면허증 조회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대한민국 영사관에 확인하니 MVC에서 직접 대한민국 면허증을 조회하는 건 아예 불가능하다). 


따져 물을 때마다 계속 바뀌는 이유에서도 알 수 있듯 그저 담당 직원의 시비를 위한 시비. 나와 같은 이유로 실기 면제를 받지 못한 누군가는 학교 교수님(권위 있는 미국인)을 모시고 다시 찾아가니 필기시험에서 특정 문제를 틀렸기 때문이란다. 어떤 문제인지는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단다. 






억울했지만 어쩌겠나. 실기시험도 준비해야지. 시험 날짜도 내 마음대로 잡을 수 없어 다시 또 2주를 기다려야 한다. 미국에 도착한 지 한 달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도착 직후 구매한 차는 통학용으로 남편이 사용 중이고, 차가 있어도 운전면허증이 없는 나는 보험에 등록할 수 없으므로 운전을 할 수 없었다. 기숙사 입소 전 우리의 임시 숙소는 타운하우스. 차 없이는 장보기조차 할 수 없는 고립된 곳에서 본 다리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곁다리 처지를 매일 같이 곱씹으며 35년간 쌓아온 내 정체성은 급격하게 자리를 잃었다. 


긴 기다림과 불안과 방황 끝에 드디어 면허증을 손에 쥐었던 날, 우리는 축하 파티를 했다. 


실기시험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했다. 한 번에 합격하지 못하면 지난하고 무기력하게 조종당하는 과정을 다시 한번(한 번만에 끝나면 몹시 운이 좋을) 해야 한다는 두려움. 밤낮 인터넷을 뒤져도 실기시험 사례를 찾기 힘드니 무지로부터 기인하는 불안. 경험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MVC 직원들의 고압적 태도. 시험은 원래가 긴장되는 법인데 심지어 익숙하지 않은 영어.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한 번에 안전하게 가고 싶었다.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 아니라 현지 연수 기관을 찾았다. 강사는 친절했고, 잘 만들어진 족보를 가지고 있었으며, 경험이 많은 데다 MVC 직원과의 친분까지 있었다. 오, 하느님! 


시간과 걱정과, 실제로도 많은 돈이 들어간 "값비싼" 뉴저지 드라이버스 라이선스를 갖게 된 후로도 내가 직접 운전을 하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건 일단 잊어버리자. 드디어 나도 보증인인 남편과 동행하지 않아도, 어디서건 내밀기만 하면, 곁다리임을 굳이 언급하지 않고도 내 신분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 주는 의미가 훨씬 컸으니까. 뭐 얼마나 대단한 나라라고 합법적 체류자 표식 하나 받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건데? 지난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우리 부부에게는 그간 희박했던 애국심이 생겨났다. 



운전면허학원 직원이 내민 족보는 가뭄의 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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