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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운 Dec 29. 2020

기억은 하나의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사진에 관한 생각


나는 군대에서 처음 DSLR을 들었다. 영상제작병 모집 공모를 보고 일반병보다는 편해 보여 지원했다. 보통 그 시기에 입대하는 친구들보다 나이가 많았던 덕에 가산점을 받아 합격할 수 있었다. 자대배치를 받고 난 후에 영상제작병이 사단장을 따라다니며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는 보직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때는 DSLR이 이렇게 무거운 기계인지도 몰랐고, 캐논의 6D라는 카메라가 백 만원이 넘는 카메라인 줄도 몰랐다. 어떤 날은 수해를 입은 마을에서 바지춤이 젖어가며 사진을 찍기도 하고, 12월 31일 해가 질 때부터 시작해서 1월 1일 해가 뜰 때까지 사진을 찍기도 했다. 우리 부대에 입대한 연예인들을 포함해 시장들과 장군들, 그리고 부대에 방문한 총리의 사진도 찍었다. 군복무를 하면서 어림잡아 몇만 번의 셔터를 눌렀고, 수 천장의 사진을 편집했다.


이름 대신 '사진병'으로 불리던 그 시절에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내 사진도 찍어줘"였다. 군대에서 찍은 사진을 외부로 반출하는 건 불법이다. 그 사실을 알려줘도 그들은 괜찮으니까 일단 찍어달라고 했다. 같이 일하던 병사가 전역할 때도, 자신이 전출을 갈 때도, 체육대회에서 우승했을 때도, 표창을 받았을 때도 그들은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그들은 왜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도 없는 사진에 집착한 걸까. 왜 특별한 순간에는 사진이 필요한 걸까. 의아했다. 


전역할 때쯤 부사수에게 군생활 동안 찍은 사진들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내 군생활이 담긴 사진들을 다시 훑으며 지난하게만 느꼈던 그 날의 기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아, 이래서 그들이 사진에 집착했구나. 우리가 과거를 복기하는 방식은 일련의 과정을 기억해서가 아니라 단편적인 하나의 이미지로 시작한다. 사진은 일종의 구심점이다. 사진으로 박제된 순간은 원심력에 의해 다른 기억들로 뻗어가고, 그렇게 환기된 기억은 그 당시의 감정들과 동행한다. 자신에게 포커스가 맞춰진 사진이 아니어도 좋다. 그 날을 공유했던 사람이라면 ‘아 그땐 그랬지’라며 새로운 감정들을 내놓는다.  그래서 우리는 사진을 찍을 때 웃어야 한다고 배워왔을지도 모른다. 사진을 찍은 그 순간에 나는 웃는 사람이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전역하고 카메라를 샀다. 군대에서 쓰던 DSLR처럼 좋은 카메라는 아니지만 나름 무리해서 괜찮은 카메라를 샀다. 아직은 무슨 사진을 찍어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지만 최대한 날 것 그대로의 사진을 찍으려 노력한다. 아름다운 것보다는 무심코 시야에 들어온 그대로. 언젠가 찍은 사진들을 보며 그 날을 상기할 수 있는 그런 사진. 잘 찍은 사진보다 감정이 잘 담긴 그런 사진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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