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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같이 돌자 상트 한 바퀴, 십 리도 못 가 발병난다

Pongi, 유라시아 여행기 : 상트페테르부르크 편 #4

by 포그니pogni



내 기분은 내가 정해,
오늘은 '행복'으로 할래.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中



점심을 먹은 후 본격적인 문가(MG) 투어의 시작. 오후 일정은『겨울궁전 (에르미타주 박물관) -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 피의 구원 사원』순서이다. 그리고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돌아가 겨울궁전과 피의 구원 사원 야경을 봐야지. 바깥바람은 여전히 춥다. 겨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교통수단 이용 없이 걸어서 관광하려니 항상 볼을 빨갛게 상기되어 있다. 그나마 군고구마 장수 모자를 안 샀으면 귀까지 빨갛게 상기됐겠지. 쉽지 않지만 추운 날씨와 어울리는 곳이 바로 러시아 아니겠는가! 오늘 내 기분은 '행복'이다. 행복하니까 혹독한 겨울 날씨도 전부 아름다워 보인다. 이게 바로 긍정의 힘이지. 나는 여행 중이니까. 전우들이여, 돌아보자! 상트 한 바퀴를. 나는 문가 투어의 수장답게 맨 앞에서 우리 일행들을 리드하며 겨울궁전까지 걸어간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던, 겨울궁전 앞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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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1812년 프랑스를 물리치고 세운 개선문 / (우) 궁전 광장 앞에서의 기념사진




피의 일요일 그리고 러시아 혁명의 현장
"겨울궁전"



세계 3대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루브르 박물관, 대영 박물관, 바티칸 박물관. 비록 겨울궁전(에르미타주 박물관)은 세계 3대 박물관에 포함되진 않았지만, 3백만 점이 넘는 미술품을 보유하고 있고, 그 규모만큼은 어마어마하다고 전해진다. 박물관 안으로는 다음날 들어가 보기로 하고, 겨울궁전 외관과 그 앞의 광장을 둘러보기로 한다. 겨울궁전은 제정 러시아의 황제가 살았던 곳이다. 이곳에서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는 폭정을 행했고, 광장에서 1917년 러시아 붉은 혁명이 시작됐다. 또한, 1905년 빵을 달라고 요구하던 국민들을 무차별하게 총살했던 곳이 바로 궁전 광장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알고 겨울궁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노라니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얼마나 많은 피가 광장 바닥에 흩뿌려졌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굳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좋았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역사의 현장, 그리고 난생처음 보는 건물 양식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공부가 됐다. 여행의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스타일이 있지만 나는 무작정 쉬려고 여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경험하기 위해 여행을 한다. 물론 회사생활을 시작하고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리조트에 앉아 쉬는 것도 참 좋다. Refresh는 되겠지만 과연 내가 이 여행을 하고 과연 남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독특하고, 투박하다. 에르미타주 건물을 보고 느낀 첫인상이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됐다. 이 건물이 러시아 양식 중에서도 얼마나 나름대로 화려한 건물인지. 하지만 독특하고 투박한 건물 외관과 달리 내부는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여기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에 가게 될 예카테리나 궁전도 마찬가지였는데, 궁전 안은 온통 황금과 화려한 샹젤리제 천지였다. 나중엔 황금 보기를 돌같이 보게 됐으니 말 다했다. 어쨌든 이런 화려함은 나중에 소개하기로 하고, 오늘의 문가 투어 콘셉트는 '다 같이 돌자 상트 한 바퀴'니까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겠다. 아참 문가 투어의 기본 콘셉트를 언급하지 않았는데 주요 관광지를 최대한 많이 인증샷을 찍고 빠르게 넘어가는 것이 콘셉트이다. 특히 다음 빼쪠르 다음이었던 유럽여행에서 더 그랬는데, 그래도 나는 봤던 것들 하나하나가 다 기억이 난다. 그냥 최대한 많이 보는 것이 아니라 임팩트 있게 봐서 기억에 남기는 것이 목표다. 걸어가면서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목적지와 역사적 의의 등을 다 설명했다. 음.... 마치 타이베이 '예스진지' 버스 투어에서의 가이드 같군.



겨울궁전 뒤편 다리를 건너면서 찍은 궁전의 모습
길 가면서 봤던 어느 유럽풍 양식의 건물 - 큰 의미가 있는 건물은 아닌 것 같다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를 가기 위해 겨울궁전 뒤편의 다리를 건너본다. 여름이 되면 이 다리는 대표적인 야경 명소로 변한다고 하는데, 아래도 겨울바람맞으면서 다리에서 야경을 보는 것은 힘들겠지. 걷는 내내 러시아 대륙의 클래스가 느껴졌던 것은 거리가 짧아 보여도 체감상으론 그 이상을 무조건 걸어야 했다. 에르미타주에서 요새까지는 1.8km. 30분이면 걸어갈 수 있다고 했는데 체감으로는 50분 정도 소요됐다. 운동화도 아니고 캔버스화를 신고 하루에 10km를 넘게 걸으니 발병이 날 수밖에 없지. 이때부터였다. 발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래 걷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오는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것 같은 통증으로 치부하고 계속 걸었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발이 땅에 닿기만 하면 통증이 심해서 왼발을 거의 끌고 다녔다. 다행인지 나처럼 똑같이 발병 났던 친구가 있었는데, 동지애가 생겨서 그래도 힘이 났던 것 같다. 발병 얘기는 나중에 더 해보도록 하자. 어디 여행 갈 때는 많이 걸을 것 같다고 생각되면 무조건 운동화, 워킹화, 러닝화 중에서 골라 신고 다니기를 추천한다. 발병 나서 여행을 망칠 수도 있으니.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1, 겨울궁전에서도 보이는 첨탑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2, 요새답게 실제 사용했던 대포도 전시되어 있었다.



스웨덴 군대를 막기 위해서 건설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중심 국가라고 자부하는 스웨덴. 지금 러시아는 핀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지만 과거 핀란드 땅은 스웨덴 왕국의 영토였다. 표트르 대제에 의해 원래 스웨덴 영토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점령하고 그들을 막기 위해 건설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러시아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이다. 그런데, 실제로 스웨덴의 침공은 단 한 번도 없어서 요새 구실을 했던 적은 없다. 대신 러시아 정치범들을 수용하는 감옥으로 쓰였다고. 지금은 박물관이 되어 방문했던 당일에 러시아 현지 어린이들이 많이 있었다. 참고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구글맵에는 '피터 앤 폴 요새'라고 명기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로 바뀌었다.


요새의 외형과 내부를 봤을 때, 요새라기 보단 하나의 큰 전함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 첨탑과 초소 건축물 형태가 돛처럼 생겨서 그런 것 같다. 그리고 성당을 포함한 일부 건물 안으로 매표를 해야 들어갈 수 있었는데, 약 500 루블 정도 되는 적지 않은 금액이라서 밖에서만 봤다. 특히 대성당 안에는 표트르 대제부터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까지 황제 및 황실가 가족들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나중에 모스크바 크렘린 궁을 갔을 때, 이 내부에도 러시아 역대 황제들의 무덤이 있었다. 그때 느꼈던 묘한 감정이란 잊을 수가 없다. 관을 봐서 불운하고 나쁜 느낌이 아니라 왕들의 아우라가 풍기는 느낌이었다. 이처럼 당시 안에 들어갔으면 표트르 대제의 어마어마한 기운을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만약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 다시 갈 수 있다면 날씨 때문에 못 갔었던 여름 궁전과 함께 페트로파블롭스크 대성당 내부는 꼭 들어가야지. 여행할 때 돈 아깝다고 안 가서 후회하지 말고 언제 다시 또 오겠냔 생각으로 지를 때 질러야 한다는 것이 이곳에서의 교훈이 아닌가 싶다.



피의 구원 사원(그리스도 부활 성당), 인증샷 필수 코스인데 얼굴이 추워서 붉게 상기되어 있다



러시아 건축의 꽃이자 황제가 피 흘리며 죽은 그곳,
피의 구원 사원 (그리스도 부활 성당)



테트리스에 나오는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성 바실리 대성당'을 모델로 삼아 건축된 '피의 구원 사원'. 원래 명칭은 그리스도 부활 성당이다. 우리끼리는 그냥 '테트리스 2 성당'이라고 불렀다. 나는 감히 이곳을 러시아식 건축물의 꽃이자 끝판왕이라고 부르고 싶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정말 독특한 양식이다.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래도 유럽이랑 맡닿아 있는 러시아인데, 어떻게 이렇게 독특한 건축 양식을 발전시킬 수 있었을까? 러시아 하면 일명 스탈린 7 공주라고 불리는 가령 모스크바 대학교 본관 건과 같은 소련식 거대한 건물이 생각났는데, 소련 시절 레닌그라드라고 불리는 빼쪠르에는 그런 건물의 흔적을 거의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유럽 같지만 피의 구원 사원과 같이 러시아 고유의 건축 양식이 그대로 살아 숨 쉬는 곳. 난 이렇게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를 정의하고 싶다.


나는 실제로 성 바실리 대성당과 피의 구원 사원을 둘 다 봤었다. 그런데 화려함과 규모는 아무래도 테트리스 2 성당이 더 컸던 것 같다. 여긴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실제로 가서 봐야 한다. 이곳의 야경도 정말 화려한데, 나는 이를 미리 구글링을 통해서 찾아보고 밤이 될 때까지 근처 카페에서 대기를 했다. 또한, 그 카페에선 KIMEP 대학교 정규 학생 형님 한 분과 그의 여자 친구를 만났다. 그 여자 친구는 벨라루스의 의사였는데, 낯선 곳에서 낯선이와 영어로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 이색적이고 재밌는 경험이었다. 그게 인연이 되어 인스타그램 맞팔로우도 하게 됐는데, SNS란 수단을 통해서 그 나라의 삶을 엿보는 것도 재밌었다. 여행의 묘미 중에 하나는 예상치 못한 인연을 맺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후에도 여행 갈 때 게스트하우스 도미토리 룸에 묵으면서 수많은 인연을 만났다. 비록 지금까지 이어진 인연은 거의 없지만, 젊었을 때 아니면 언제 또 이렇게 스스럼없이 얼굴 맞대고 소탈하게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을까 싶다.


오후 4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벌써 해가 지고 있다. 어둡고 긴 흑야의 밤이 시작됐다. 이제 문가 투어 빼쪠르 여행 1일 차 하이라이트가 다가오고 있다. 비록 카페에 앉아 있으니 발이 부어서 발병이 심해지고 있지만, 이 도시의 아름다운 밤을 포기할 순 없지! 다 같이 돌자 상트 한 바퀴, 피의 구원 성당부터 다시 숙소로 가는 길의 카잔 성당까지. 상트의 밤을 느껴보자!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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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길 기다리면서 먹었던 어느 현지 카페의 케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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