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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구 Oct 16. 2023

시월에

( 나는 의류업을 합니다 )

 마늘 심으러 아내가 나가고 나는 홀로 거실에 있었다. 햇살이 스포트 라이트처럼 바닥을 비췄다. 음악을 들으며 커피와 과일을 먹었다. `무얼 입고 나갈까` 잠시 생각하다가 차 트렁크에서 골프백을 집안으로 옮길 때 썰렁하던 느낌이 생각났다. 목도리를 하고 가죽점퍼를 입었다.


 날씨가 맑아서 걷고 싶었다. 급하지 않을 때는 출근도 대중교통을 이용하지만 오늘은 그 마저도 싫었다. 주황색으로 칠해진 교회의 첨탑 위로 하늘이 더 파랗다. 도로 쪽으로 나오자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산책하고 오는지 반바지 차림으로 신호등을 건너고 있었다. 나도 서둘러 횡단보도로 뛰어들었다. 가볍게 뛰었는데 운동화 끈이 풀려서 나풀거렸다. 끈을 묶고 다리 위로 올라서자 바람이 불었다. 일렬로 세워진 화분에는 노란 국화가 막 피어나고 있었다. 동전크기의 노란 꽃이 햇빛과 바람을 맞고 있었다. 다리의 중간쯤에서 물을 바라봤다. 폭이 넓지 않은 천은 햇빛을 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비어있는 하늘이 넓고 물은 유리처럼 반짝거렸다.

 작은 참새떼 한 무리가 바닥에서 나무로 날아오른다. 보라색 나팔꽃이 경사면을 기어오르고 벚나무는 잎을 떨구었다. 이름 모를 나무 한 그루가 열매를 잔뜩 달고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주렁주렁 매달린 열매를 버티는 가지를 보니 자연은 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을 살다 보면 `좋은 것이 꼭 좋은 게 아니고 나쁜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된다. 저 나무도 꽃이 피었을 때는 좋았겠지만 열매가 너무 많아 가지가 부러질 지경이니 말이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처럼 나무도 사람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시간이 흐른 후에 보면 단점이 장점이 되는 경우도 많이 있지 않던가.


 모퉁이를 돌자 자생하는 버드나무가 보인다. 이곳은 크고 작은 버드나무가 어우러진 길이다. 어떤 버드나무는 물가에 발목을 적시고, 저만치 떨어져 크게 자란 나무와 비슷한 키로 어깨동무하듯 나란히 선 나무도 있다. 인위적인 획일함이 없어 내가 좋아하는 길이다. 버드나무가 보이는 의자에 앉아 물소리를 듣고 물길을 오르는 피라미 떼를 본 적도 있다. 버드나무는 늦게까지 푸르름을 간직한다. 찬 바람에도 쉽게 잎을 떨구지 않다가 겨울이 돼야 줄기처럼 늘어뜨린 가지와 함께 날아간다. 그리고 제법 이른 봄이면 줄기와 잎이 돋아난다. 말랑한 연두빛깔의 새잎이 나는 순간은 짧지만 신비롭고 아름답다. 고대인들은 버드나무껍질과 잎을 약으로 사용했다. 아스피린의 재료를 여기서 추출한다고 하니 나무 하나도 버릴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핀란드의 디자이너들의 얘기를 담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들은 단순함과 실용성을 중요시하는데 그것을 배우는 곳이 자연이라고 얘기한다. 자연과 마주하고 고요를 대면하면서 `장식의 허세`를 버리고 `극도의 단순함이 갖는 아름다움`을 알아간다고 한다. 자연에서 만들어진 것에는 버릴 것이 없다. 필요에 의해 생성되고 시간이 지나면 소멸되지만 필요한 것이 있어야 할 곳에 있는 셈이다. 


 다리를 건너고 천변을 따라 출근한다. 시월의 날씨는 걷기에 좋았다. 꽃과 나비가 있고 햇볕은 열매를 영글게 한다. 어린 새들은 살을 찌우느라 부산하게 날아다녔고 휴일을 즐기는 사람들이 천변을 끼고 느긋하게 산책을 한다. 계절이 깊어지면 물빛은 더 짙어지고 잎은 바랠 것이다. 바람이 불고 조금은 썰렁해지겠지만 천변을 사이에 두고 자리 잡은 나무가 있어 외롭지 않으리라. 잎이 지고 나면 천변의 폭은 더 넓어 보일 것이다. 그 사이로 느리게 흐르는 물과 보폭을 맞춰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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