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의류업을 합니다 )
머리는 조금만 더 길어도 거추장스럽게 느껴진다. 그 느낌은 본인이 가장 잘 안다. 미용사가 가위를 대자 벌초할 때 잘려나간 풀처럼 머리카락이 수북이 쌓인다. 머리털이나 체모 등은 잘려 나가도 감각이 없다. 피부를 토양으로 양분을 얻고 식물처럼 자라는 머리털과 체모가 남아있는 것은 진화의 흔적일 것이다.
털이 많은 개를 키운 적이 있다. 계절이 바뀌면 털갈이를 해 빗질을 하곤 했다. 털은 거칠고 촘촘해 외부의 침입을 쉽게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았다. 개의 피부는 감각이 거의 없다. 추위나 더위도 못 느끼고, 감각은 콧등이나 발바닥에 발달해 있다. 더위를 많이 느끼는 개의 땀은 주로 발가락 틈새로 배출된다. 가끔 개들이 앞발을 포개고 코를 킁킁 거리는 것은 자신의 체취를 즐기는 행위다. 동물들이 인간보다 뛰어난 감각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은 시각, 후각, 청각 등이 발달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감각 기관을 가진 동물은 감정을 느낀다고 한다. 감각은 감정을 이해하는 데 무척 중요한 요소라고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들도 감지된 감각의 결과물인 셈이다. 몸의 감각으로 생성된 감정은 흐름을 유지하는데 이를 통제하는 능력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래서 때로 어떤 분위기에 휩싸이기도 하고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하기도 한다. 냄새나 소리에 의해 변화를 일으키기도 하고 날씨가 원인일 때도 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상점가는 비가 오면 한가하다. 저녁때가 되자 거리는 간간히 지나던 학생들도 사라지고 텅 비었다. 일찍 문 닫은 매장들 때문에 더 어두웠다. 문을 닫으려고 준비를 하는데 우산터는 소리가 나고 갑자기 한 남자가 나타났다.
" 사장님, 저 아시죠. 저 우리 마누라,,, 중국 여자랑 같이 와서 아들 옷 사가지고 자주 왔잖아요."
그러고 보니 목소리는 크고 우리말이 서툰 여자와 늘 함께 다니던 남자였다. 몇 번 같이 온 것은 기억나는데 남편이라는 이 남자는 심드렁하니 앉아서 휴대폰 게임을 했었고 나와 인사를 나눈 적은 없었다.
" 아, 제가 좀 부탁 좀 드리려고요. 제가 오늘 의료원에 문상을 왔는데, 옆 신한은행에 돈을 찾으러 들어갔다가 지갑을 잃어버렸어요."
내용을 들어보니 돈을 인출하고 있는데 쾅하는 소리가 나서 급히 나가보니 길가에 세워둔 차를 박았더란다. 경찰을 부르고 사고처리를 했는데 갑자기 지갑과 카드를 은행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나서 가보니 누군가 가져가 버린 후였다고 했다. 경찰이 CCTV를 확인하고 갔으니 곧 찾을 수 있을 거라며 걱정 없을 거라는 투로 말했다.
" 우선 문상은 다녀와야겠는데, 돈을 좀 빌려주시면 내일 오후 다섯 시까지 갖다 드리겠습니다. "
하면서 시계를 풀어 맡기겠다고 손을 내밀면서 간절히 부탁했다. 나는 더 묻지 않았고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안경 속 그의 눈에는 빗물인지 눈물인지 번득거렸고, 나는 그의 전화번호만 확인하고 시재금을 그에게 쥐어 주었다. 그의 얘기를 듣는 동안 나는 그가 당한 사건과 처한 상황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동의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렇게 급하면 집으로 가서 해결책을 찾든지, 친구나 지인에게 부탁하면 되는 일일 거라고 의심도 했다. 내 맘속에는 이야기의 논리적 허점을 찾으려는 날카로움과 그 사람의 간절한 눈빛이 감정이입 된 안쓰러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결국 어떤 이유였는지 모르지만 울듯한 그 표정을 외면할 수없어서 이름도 묻지 않고 돈을 빌려준 것이다. 그리고 급히 나가는 그의 뒷모습에서 문득 어떤 모습이 오버랩되어 떠올랐다. 그가 나간 빈자리에 몇 년 전 노름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떠났던 친구의 뒷모습이 나타났다. 혈육처럼 가깝게 지낸 친구였다. 돈을 빌린 친구는 급히 나갔다. 그리고 다시 오지 않았다.
문을 닫고 생각해 보니 내일 직접 올 필요는 없을 거 같아 계좌로 보내라고 전화를 했다. 신호가 여러 번 갔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생각이 많았다. 아내에게 말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아무래도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것 같았다. 아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대답했다. 그 질문은 ` 왜 거절하지 못할까? `에서 시작해 `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라는 답변의 반복이었다. 내 행동의 근거가 될만한 감정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쉽게 잠들지 못했다.
다음 날이 되자 기분은 좀 나아졌다. 밤새 고민을 했지만 큰돈도 아닐뿐더러 두 번째 화살까지 맞는다면 비참한 생각이 들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 오후 다섯 시를 기다려보고 연락이 없으면 잊기로 맘을 먹었다.
다섯 시가 넘어도 연락이 없었다. 사기당했다는 자괴감도 들었지만 전화기를 붙들고 있을 내 처지가 더 꼴 사나울 것 같았다. 내 마음속의 연민이 내민 적선이었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잡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지만 맘 한 구석에는 여전히 여진처럼 배신의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문자를 보내기로 했다.
` 경찰서 일이 잘 안 풀렸나요?
빌려간 돈은 해결되는 대로 천천히 보내 주세요.
일 마무리 잘하시고 힘내세요^^ `
아무런 답도 없었다. 무슨 답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나에게 보내는 다짐이자 메시지였다. 혹시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다면 힘내라는 응원이었다.
무더위가 시작되어 에어컨에 몸을 맡기지 않고는 하루도 견디기 힘든 본격적인 여름이다. 돈을 빌려간 사람도 그의 아내도 매장에 오지 않았다. 나는 이제 그 일을 잊고 있다. 하지만 가끔 나는 질문을 던져본다. 다시 그날처럼, 아무도 없는 비 오는 밤이 오면, 혹시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온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