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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에필로그

(나는 의류업을 합니다)

by 장보구

어두워졌지만 인솔자가 들고 있는 빨간 깃발이 불빛에 보였다. 인솔자는 한 손에 깃발을 든 채 전화를 하는지 주변을 맴돌면서 서성이고 있다. 삐딱하게 들린 깃발이 꺾인 군기[軍旗]처럼 초라하다. 먼저 온 사람들은 조용히 얘기를 나누고, 대성당 광장에 모인 인파를 바라본다. 웃고 떠들었던 어제와는 다른 흉흉한 분위기다. 다 모인 것을 확인하자 우리는 버스로 향했다. 아무도 묻지 않았고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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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안에서 인솔자는 회사에 보고한 상태고 아직 결정된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여행 공동 경비`중에 남은 예비비용이 있다고 개인당 10유로씩 나눠주겠다고 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모두 객실로 올라갔다. 매일 밤 소모임 규모로 열리던 맥주파티도 사라졌다. 일정은 아직 3일이나 남았지만 황당하고 불행한 사건의 여파로 분위기는 침울할 것이다. 앞니가 빠진 인솔자를 볼 때마다 상황이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새로운 인솔자가 오더라도 친숙해지기에 짧은 시간이다.

호텔은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건물과 시설이 현대식이다. 나폴리와 로마 근교는 객실 키가 광의 열쇠처럼 고풍스러웠는데 오늘은 카드 키로 받았다. 콘크리트 철근 구조의 모던한 사각형의 밋밋한 건물이지만 왠지 반가운 느낌이다. 카드키를 꽂자 환하게 불이 들어온다. 회색톤의 직물 카펫이 낯설지 않다. 어두운 창 밖으로 가로등이 보이고 그 사이로 이동하는 차들이 보인다. 어둠의 입자가 깊게 느껴진다. 손을 대면 부드럽게 감겨올 것만 같다. 물에 떨어진 돌처럼 파문을 일으키다 가라앉을까. 부드러운 질감과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창으로 한줄기 빛이 지나간다. 나는 빛이 지나간 곳을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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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도시의 좁은 골목길을 돌아다녔다. 로마였을 것이다. 좁다란 골목을 돌아가면 하얀 식탁보가 깔린 탁자가 놓여있고 점원으로 보이는 구레나룻의 사내가 담배를 피우고 있다. 창이 낮은 어떤 상점의 테라스에는 시클라멘이 환하게 피어있고 우연히 들어간 고서점에서 옛날 지도와 콜로세움의 설계도를 구경한다. 고리고리하고 쿰쿰한 냄새가 가득한 식료품점에서 치즈와 올리브유, 발사믹, 단면이 아름다운 살라미를 한참 바라본다. 체크무늬 재킷과 베스트가 잘 어울린 마네킹 앞에서 서성이다 갑자기 내린 비를 피하려 카페에 들어간다.

나보나 광장의 성 아그네스 성당으로 들어간다. 입구부터 사람들로 붐볐고 성당 안은 어두웠다. 촛불을 들고 서있는 사람들, 청아하게 들려오는 합창소리, 참회와 용서를 비는 다윗의 기도가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울려 퍼지고 천정의 벽화는 화려하게 아름답다. 합창 때문인지 은은한 불빛에 드러난 성당 내부의 고결한 정교함 때문인지 나는 잠시 넋을 잃었다. 그리고 합창이 끝나자 촛불이 꺼졌고 일순간 어둠이 몰려왔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움직임이 느껴졌는데 문 밖으로 나가는 작은 소녀를 본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밖으로 나왔고 인파 속에서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다음날 인솔자는 치료를 받으러 떠났다. 새로운 인솔자가 인사를 하고 나자 나는 마이크를 잡았다.

" 안녕하세요. 저도 여러분과 함께 여행하는 여행잡니다. 어제는 불미스러운 일로 맘이 착잡했을 거라 생각됩니다. 어제 한 선생님이 떠나면서 우리에게 10유로를 주고 갔습니다. 로마에서 인본주의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피렌체에서 르네상스의 관용과 배려에 대해 알게 됐고요. 그래서 감히 말씀드립니다. 그동안 열정으로 우리를 이끌어준 한 선생님의 노고에 보답하는 의미로 기부를 제안하려고 합니다. 여기 운전석 뒷자리에 봉투를 두겠습니다. 참여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들렸다.


일상의 거미줄에 걸린 나방처럼 살았다. 차안대를 두른 말처럼 앞으로만 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가방 하나만 들고 떠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감행하지 못했다. 그날, 신호등에 걸린 차 안에서 바라본 흰구름이 아니었다면 거미줄을 끊지 못했을 것이다.

이십 대의 나는 지중해의 푸른 물결을 꿈꾸었다. 무기력했던 자기 연민의 시절, 그리고 봄에서 여름까지 함께 보낸 소녀에 대한 기억. 시간이 멈춘 듯 과거를 간직하고 있는 이탈리아의 도시에서 나는 이십 대의 나를 만나고 왔다.

이 여행으로 과거의 나를 변명하거나 이해를 구했던 것은 아니다. 맘속에 고집스럽게 자리하고 있던 스무 살의 나를 지중해에 두고 온 것 만으로 내겐 위로가 되었고 예순 살에도 떠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으니까. 새로운 갈망이 또 떠나게 할지 모른다. 알베르 까뮈가 사랑했던 노란 햇빛, 샤갈의 마을, 하이랜드의 순록이 나를 일으켜 세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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