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리 Jan 02. 2024

새 차를 살 때 내가 떠올리는 것들 4

친구네가 새 차를 샀다는데


친한 친구 중 하나가 새 차를 샀다. 신형 제네시스 G80 모델이었다. 국산차 중에서는 고급 세단에 속하는데 최근 들어 길에서 꽤 자주 마주친다는 인상을 받았던 차였다. 저 차가 요즘 인기가 많나 보네, 비싸 보이는데. 다들 그만한 돈쯤은 차 사는 데 쓸 만큼 여유 있게 산다는 건가, 하고 무심히 넘겼었는데 친구가 그 차를 샀다니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그 차를 얻어 타게 되었는데, 외관만 고급스럽게 번지르르한 것이 아니라 차 내부도 부티가 흘러내렸다. 부드러운 크림색 가죽 좌석의 엉덩이를 푹신하게 받쳐주는 쿠션감, 차의 앞부분과 뒷부분, 위에서 본 차의 모습까지 내가 원하는 각도로 차의 위치를 보여 주는 화면 옵션, 센스 있게 배치된 좌석 가운데 컵홀더와 각종 편의를 위한 스위치들.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져 나에게 외치고 있었다. 너희 차에는 이런 거 없지. 이래도 너희 집이랑 우리 집이 비슷하게 사는 거 같아?


그 친구는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웃을 것이다. 무슨 소리야, 너희도 마음만 먹으면 이런 차 살 수도 있잖아. 오버하지 마, 하고 손사래를 치며 웃을 것이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도 물론 마음먹으면 이 차를 살 수도 있다. 몇 년이 지나도 카니발이 전기차로 출시될 거라는 소식이 들리지 않자 그도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며칠 전에 나에게 카니발 전기차는 포기해야겠다고 말했다. 그 대신에 제네시스 G80을 사고 싶다고 말했다.


왜 하필 그 차였는지는 모른다. 친구가 그 차를 샀다고 하고 내가 그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온 날 그 차의 우월함에 대해서 일일이 신기해하고 부러워했던 그 이야기에 얼마간은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겠고, 이래저래 알아본 결과 어차피 차를 살 거라면 조금만 더 돈을 주고 한 단계 더 고급 승용차에 눈길을 돌리다 보니 도출된 결론일 수도 있겠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깡통(옵션 없음)으로 사면 오천오백이면 살 수 있대. 기왕에 새 차 살 거라면 돈 조금 더 주고 진짜 후회 안 할 만큼 좋은 차 사고 싶어.”

스파크를 사면서 새 차를 살 때 어떤 과정을 거쳐 초기 가격이 눈덩이처럼 늘어나는지를 겪어본 바 있는 내가 바로 반박했다.

“깡통 가격은 생각 안 하는 게 좋을걸. 깡통이 왜 깡통인 줄 알아? 진짜 말 그대로 깡통이라서야. 옵션이라고 하면서 넣어도 좋고 안 넣어도 별문제 없을 것처럼 말하지만 실은 그 옵션들 중에는 정말로 꼭 필요한 것들이 있어. 넣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것들을 옵션이라는 말로 포장해서 판단 말이야. 그러면 넣지 않을 수 없고, 그러다 보면 애초에 생각했던 가격을 훨씬 넘는 가격에 차를 사게 돼. 내가 예상하기에 깡통이 오천오백이면 필수 옵션만 넣어서 산다고 해도 칠팔천은 족히 나올걸.”


잠시 침묵했다가 그는 시무룩해진 얼굴로 말했다.

“기왕 차 사는 거 좋은 차 사겠다고 평소와 다르게 큰마음먹었는데, 여보한테 좋은 소리 못 들으니까 기운 빠지네.”

“아… 좀 많이 놀라긴 했어. 카니발을 포기할 거라고 생각도 못 했는데 갑자기 카니발이 아니라 그렇게 비싸고 좋은 차를 산다고 하니까…….”

“그게 뭐 우리 형편에 그렇게나 과분한 차인가? 우리가 그렇게까지…… 어려운 형편은 아니잖아? 모아둔 돈도 꽤 있고…….”

“뭐, 그렇긴 한데…… 뭐랄까 좀, 우리 평소에 세차도 제대로 한 적 없고, 우리 둘 다 차는 잘 굴러다니기만 하면 상관없다는 주의인데 그렇게 비싸고 좋은 차 타고 다닌다고 해서 갑자기 없던 습관이 생겨나서 차를 주기적으로 세차하고 광택 내고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러면 금방 지저분해질 테고 보기도 흉해지겠지. 그건 좀 부끄러운 일이 될 것 같은데.”

“왜? 비싼 차 함부로 굴리는 것 같으면 더 ‘찐 부자’처럼 보이지 않을까?”


약간 장난기가 느껴지는 그의 말에 나는 정색하고 말했다.

“여보. 나는 지금껏 그 차를 우리처럼 굴리는 사람은 아무도 못 봤어. 우리는 비 오는 날에만 자연 세차하잖아.(세차를 따로 안 한다는 뜻이다) 그 차는 모두 깨끗해. 반짝반짝 윤이 나고. 그런 건 주기적으로 손수 세차장에 가서 세차를 하든 돈을 주고 세차를 맡기든 관리를 해야 가능한 일이야. 그 모든 일에는 정기적으로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어가. 그런 것까지 감안해서 결정해야 할 일이라고 보는데. 그리고 무엇보다 상상해 봐, 유일하게 지저분한 먼지를 뒤집어쓴 G80을 타고 다니는 우리 모습을. 그거 엄청 우습지 않아?”

그는 약간 체념한 표정으로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G80은 그만둘게. 눈 낮춰서 적당한 가격의 새 차를 사자.”

“그래.”


그렇게 대화는 종료되었고, 각자의 생각을 곱씹는 시간이 남았다. G80을 타고 다니는 우리를 상상하는 게 우스웠던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세차를 거의 하지 않고 차를 막 굴리는 게으름뱅이들이라서? 직접 세차를 할 만큼 부지런하지는 못하지만 세차를 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비용을 지불하기는 아까워하는 사람들이라서? 자가 소유의 집이 없고 언제 집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종잣돈 칠천만 원가량을 차를 사기 위해 지불할 만한 심리적 여유가 없어서? (사실 모아둔 돈은 있다. 마음만 먹으면 빚을 내지 않고 구입할 수도 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아니면 그냥 내가 어려서부터 늘 검소하게 살아온 탓에 검소한 생활 패턴이 익숙해져서 무의식적으로 고급스럽게 느껴지는 물건들로부터 부담을 느끼는 심리적인 방어 기제 때문일까? 아무튼 나는 제네시스 G80을 끌고 다니는 우리의 모습이 마치 빚을 잔뜩 끌어모아 분수에 넘치는 명품백을 사서 신줏단지처럼 모시고 다니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두려웠다. 에어컨이 나오지 않고 ‘배출가스 5등급’ 경고장을 받은 중고 카이런을 계속 타고 다니는 데에도 동의할 수 없었지만, 제네시스 G80과 동행하는 내가 우스꽝스러운 조합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들여야 할 노력과 비용에도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새 차 구입 건 때문에 오랜 세월 그와 실랑이를 벌여왔고 그의 의견에 지금껏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그가 내 의견을 받아들이게 된 데에 있어서 그에게 미안하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조금 더 일찍 취직해서 더 돈을 모았다면, 우리가 G80을 살지 말지를 고민하면서 우리의 경제관이나 재정 상황을 비관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후회가 들었다고 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가난하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씁쓸하고 때로는 자기 파괴적이다. 그런 그의 말을 들으니 그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그냥 그까짓 거, 모아둔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흔쾌히 사자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역시 아니었다. 나는 적게는 이삼천만, 많게는 삼사 천만 원 정도 차이가 마음의 여유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거두어들이기도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모아둔 돈은 일종의 심리적인 보험이다. 이건 정말로 큰일이 나기 전까지는 최대한 건드려서는 안 되는 거다. 돈이 있을 때와 없을 때 내 마음은 크기도 모양도 변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그래서 결국 무슨 차를 샀냐고? 이후의 선택 과정은 모두 그에게 넘겼다. 나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언제쯤 새 차를 살 수 있을 것인지 모른다. 뭐, 언젠가는 사겠지. 그 카이런을 고치느니 차라리 그런 차 한 대를 살 수 있을 만큼의 중대한 고장이 난다면. 내가 라노스가 멈췄을 때 수리비 100만 원 이야기를 듣고 그걸 버렸던 것처럼.





*마지막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새 차를 살 때 내가 떠올리는 것들 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