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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리 Mar 01. 2024

유아차가 뭐라고, 사람이 이렇게 변하니

 최근에 인터넷 알고리즘 추천 뉴스를 보다가, 리듬체조 국가대표 출신 손연재가 ‘200만 원대 유모차’를 공개했다는 기사에 눈길이 갔다.* ‘200만 원대 유모차’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한 브랜드 유아차**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여성 유명인의 과시적 소비를 미끼 삼아 사회에 유의미한 내용은 없는 낚시성 제목의 기사들을 지나치게 많이 봐온 탓에 호감이 가는 뉴스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유아차의 정체가 내가 단박에 떠올린 그 유아차가 맞는지 궁금해 기사를 클릭했다. 딩동댕! 나는 정답을 맞혔다. 그리고 전혀 기쁘지 않았다.

 내가 그 유아차를 알아맞힌 데에는 사연이 있다.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원에 들어간 뒤부터 하루종일 맘카페와 인터넷쇼핑몰을 들락거리며 분유부터 젖병, 공갈 젖꼭지(쪽쪽이), 가제손수건과 수유 쿠션을 검색하기 바빴지만, 그 어떤 육아용품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오랫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것이 바로 유아차였다.

 왜 하필 유아차였을까. 내 삶이 육아와 무관하게 느껴졌던 과거에는 다른 사람들이 끌고 다니던 유아차가 별달리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린이를 태워서 밀고 다니는 수레’(표준국어대사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별 고민 없이 중고 거래 앱에서 ‘무료 나눔’을 하는 유아차를 구입했다. 중고 거래 앱을 자주 이용하다 보니 ‘무료 나눔’인 물건들이 가진 어떤 공통점을 발견했는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돈 주고는 안 살 것 같지만 아주 쓸모가 없지는 않다’는 점이다. 여기서 “돈 주고는 안 살 것 같다”는 판단은 주로 그 물건의 브랜드나 ‘비주얼’에 달려 있다. ‘무료 나눔’인 물건들은 주로 한물간 유행의 디자인이거나 해졌거나 파손된 부분 같이 상품으로써의 가치를 현저히 떨어뜨리는 요소를 가지고 있어 ‘비주얼’이 좋지 않지만, 그 물건이 애초에 만들어진 용도로 사용이 가능한 물건. 내가 ‘무료 나눔’으로 구입한 중고 유아차도 딱 그에 부합하는 ‘무료 나눔-스러운’ 물건이었다.


 그것은 어느 브랜드인지 알 수조차 없는 데다 얇고 쿠션감 없는 어두운 자주색 천이 부실해 보이는 철제 프레임을 감싸고 있는 유아차였다. 어쨌든 바퀴가 굴러가기는 했고 안전벨트를 착용하는 데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내 아이를 그 유아차에 눕히고 사진을 찍으니 뭔가 느낌이 싸했다. ‘음…. 이게 아닌데…?’ 나를 수없이 좌절하게 만드는 가운데서도 하루하루 점차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이 경이로운 아이가 허름한 유아차에 놓이자 갑자기 아이가 매 순간 뿜어내던 반짝임마저 함께 바래지는 것 같았다. 오, 이 얼마나 속물적인 생각인가!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분명히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 아이가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데! 우리 아이의 반짝거리는 외모를 내가 더 돋보이게 해주어야 하는데!

  ‘유아차가 유아차지, 뭐.’ 했던 생각은 순식간에 ‘유아차가 뭐 얼마나 비싸다고? 한번 알아나 보자.’는 마음으로 뒤집혔다. 내가 자주 들락거리던 맘카페에서 ‘유아차’를 검색하니 온갖 브랜드의 유아차들을 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는 글과 후기인지 뒷광고인지 알 수 없는 글, 모 브랜드 유아차 특가 할인 행사 광고 글이 쏟아졌다. “유아차 추천해 주세요.” 또는 “○○○ vs □□□”(특수기호는 유아차 브랜드다.) 같은 글에 달린 댓글에서는 몇몇 브랜드의 유아차가 자주 언급되는 경향이 있었다.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아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맘카페에서 압도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유아차 브랜드를 발견했다. ‘부OO’와 ‘스OO’였다.(이 글의 처음에 언급한 손연재의 유아차는 둘 중 하나다. 궁금하다면 맞혀 보시라.) 둘 다 수백만 원에 이르는 가격으로 외관상 소위 말하는 ‘부티’가 흐르는 디자인이 눈길을 끌었다. 당시에 내가 보기에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비주얼’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그 유아차에서 느꼈던 ‘비주얼’이 과연 그 자체로 미적으로 뛰어난 디자인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 유아차에 매겨진 수백만 원이라는 가격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수백만 원짜리 유아차는 내 형편에 꿈도 꾸지 못할 것처럼 여겨졌다. 그것들은 중고도 비쌌다. 그런데도 중고로 내놓는 족족 판매되었다. 다들 유아차에 이 정도 금액을 지불하는 거구나, 하는 쪽으로 점차 마음이 기울어갔다. ‘유아차가 유아차지, 뭐.’ 하고 내심 쿨하게 콧방귀를 뀌던 나는 유아차에 쓸 수 있는 금액의 한계가 얼마일지를 가늠하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오랜 고민 끝에 유명 브랜드의 디럭스형 유아차를 구입했다. 당시 내가 그것을 구입한 가격은 약 90만 원 정도였다.

 90만 원짜리 유아차에 아이를 눕혀 놓으니 한결 마음이 편안했다. 아이는 내가 상상한 모습 그대로 누워 있었다. 어느 유명 브랜드의 유아차 광고 사진에서 나올 법한 모습이다. 들뜬 마음으로 사진을 몇 장 찍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아이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유아차의 매끄러운 핸들링에, 바퀴가 바닥 위를 매끄럽게 굴러가는 주행감에 흡족했다. 새로 장만한 유명 브랜드의 유아차에 앉은 백일 남짓한 아이는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을 번번이 사로잡고는 했다. 그때마다 내가 이 유아차에 지불한 90만 원을 조금씩 나누어 보상받는 듯했다.

 하지만 내가 고민했던, 상대적으로 저렴한 브랜드의 유아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 유아차도 내 유아차와 별반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거나 심지어 더 좋게 느껴질 때, 나는 마음속 어딘가를 긁힌 것 같았다. ‘부OO’나 ‘스OO’ 유아차를 끌고 지나가는 행인을 볼 때 나도 모르게 시선이 자꾸만 그리로 갔다. ‘저거 무지 비싼 건데… 저거 몇백만 원짜린데… 실물은 저렇게 생겼구나… 실물도 멋지네… 부럽다.’ 남편과 함께 거리를 걸을 때는 흥분해서 “여보, 여보, 저것 봐. 저 유아차가 몇백만 원짜리야. 엄청나지?”하고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기도 했다. 남편은 ‘몇백만 원’이라는 말에 잠깐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뭔 놈의 유아차가 그렇게 비싸? 그렇게까지 비쌀 이유가 있나?” 나는 그 말에 대꾸하지 못하고 속으로 주억거렸다. 그러게, 내 말이.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나는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나는 그때 왜 그렇게 유아차에 집착하고 열광했던 것일까. 몇 가지 이유 중에 우선은 그것이 ‘차’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집안에서만 사용하는 물건이 아니라, 밖에서 이리저리 이동하기 위해 사용하는 물건이라는 의미에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밖으로 드러나는 것, 타인에게 보이는 물건은 종종 그 물건이 원래 지닌 용도나 가치를 훨씬 뛰어넘는 상징성을 가진다. 명품 가방이나 의류, 시계, 자동차 같은 것들.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 억대를 넘는 가격이 매겨진 그것들은 단지 본래의 용도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계급)를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한다.

 게다가 부모의 계급이 자식의 계급과 동일시되고 계층 이동이 거의 불가능해진 한국사회에서 자식이 “(경제력이) 있는 집 자식처럼 보여야 한다”는 압력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유치원에서, 학교에서, 학원에서 다른 집 아이들에 비해 가난해 보이는 것은 부모의 가난이자 무능력이고, 그에 따르는 혐오와 차별을 당할 위험성과 불안까지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브랜드 유아차 구입에 그토록 목을 맨 이유는 동네 사람들에게 ‘중산층 계급’으로 보이고 싶었던 허영심과 나의 경제적 결핍이 아이의 결핍과 그에 따른 차별로 대물림될까 두려운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전방위적으로 소비를 부추기는 강력한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양극화와 불안이 팽배해진 사회 분위기에서 아이까지 얽히게 되면 소비의 주체로서 중심을 잡기가 더더욱 어려워진다.

 이 글을 쓰는 현재 나는 더 이상 유아차에 열광하지도 비싼 유아차를 부러워하지도 않는다. 내가 속물근성에서 벗어나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커서 더 이상 유아차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 가장 크고 비싼 애물단지가 된 유아차를 보면서 생각한다. 분명히 살다 보면 또 이 거대한 자본주의 시장이 주도하는 경쟁과 불안에 흔들릴 때가 올 테다. 그때 이 유아차를 기억하겠다. 나를 오랫동안 수치스럽게 했던 이 경험을 떠올리겠다. 자주 실패하겠지만, 돈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다지도 돈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회에서 최대한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겠다. 물론 언젠가 나는 또 실패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덜 실패하기 위해서 실패할 미래의 나를 위해 쓰는 글이다.











*“‘임신’ 손연재 ‘200만원 대 유모차 공개… 자꾸 뛰는 육아용품 가격 [이슈, 풀어주리]”, 서울경제, 2023.12.30.(https://www.sedaily.com/NewsView/29YPOR8AXL)

**기사의 제목에는 ‘유모차’라고 쓰여 있었기에 그대로 옮겨 썼으나 그 뒤로는 엄마뿐 아니라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등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라는 의미에서 ‘유아차’로 바꾸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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